종치는 아이
종치는 아이
  • 반영호 <시인>
  • 승인 2015.07.1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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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 앞에서
반영호 <시인>

어려서 키가 컸던 나는 맨 뒤에 섰다. 조회 시간에도, 운동회 때도, 소풍갈 때도 항상 꼴찌였다. 교실에서도 물론 맨 뒤에 앉았다. 기마전에서는 뒤에서 병마들의 호위 속에 둘러싸여 대장깃발을 높이 들고 어슬렁댔고, 급식 때도 꼴찌, 예방접종 때도 맨 마지막이었다.

초등학교시절, 학생이 많아 교실이 부족했던 탓으로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뉘어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도 교실이 부족하여 3학년 땐 선생님들이 업무를 보는 교무실에서 공부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열악한 시골학교였다.

교무실이 우리 반 교실이었을 때 수업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을 쳤다. 교무실 높이 달린 종을 칠 수 있으려면 키가 커야 했으므로 키가 제일 컸던 내가 담당했던 것이다. 지금도 생생하다. 수업 시작할 땐, 땡땡땡땡 땡땡땡땡 땡땡땡땡, 수업이 끝나는 시간엔, 땡땡땡 땡땡땡 땡땡땡,이고 조회시간이나 비상시 운동장에 모일 때는 땡땡땡땡땡땡땡땡땡, 땡땡땡땡땡땡땡땡하고 난타를 친다. 나름 생각에 수업시작에 땡땡땡땡 네 번씩 쳤던 것은 공부시작 공부시작 공부시작이고, 땡땡땡 땡땡땡 땡땡땡은 끝났다 끝났다 끝났다이고. 난타를 치는 운동장집합은 빨리빨리다모여라 빨리빨리다모여라 빨리빨리다모여라는 의미였을 거라 생각했다. 그냥 4타씩 3번을 치면 시작이고 3타씩 3번치면 수업 끝이라는 것보다 단어를 뇌까리며 종을 치면 실수가 없었다. 암튼 키가 큰 덕에 3학년 때 1년 동안을 종을 친 인연으로 그 후 오랫동안 종치는 아이로 불리었고 지금까지도 옛 친구들 사이에 종치는 아이로 기억되고 있다. 앞에 서기 시작한 것은 군대 가서 부터였다. 어렸을 때와는 달리 군대는 키가 큰 순서대로 섰다. 정말 큰 사람은 의장대로 뽑혀가던가 기수가 되든가 집합 시 앞자리에 도열한다. 특히 제식훈련 시에는 더욱 철저히 키 큰 순서대로 선다. 어려선 조숙했었을 뿐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와 보니 내키는 고작 표준정도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저 적당한 수준이다.

사회생활에서는 키가 크던 작던 아무상관이 없다. 일찍 시작한 사업이 번창하고 하고자하는 일들도 술술 잘 풀렸다. 취미로 쓰던 글들이 좋은 반응을 보이면서 시는 신춘문예에 당선되는가 하면 수필은 문학상에 당선되고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는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으며, 우화집은 우수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됨과 동시에 문학 분야에서 주목받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릴 때 맨 뒤에 섰던 나는 성장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맨 앞을 달려갔다. 가만히 현재를 바라보면서 깜짝깜짝 혼자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고소공포증이랄까? 이 단체 저 단체에 책임을 맡으면서 앞서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다시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하나둘 책임을 다하고 내려앉을 때마다 깊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무사히 마치게 된 홀가분함은 무거운 짐을 벗어놓는 것과도 같았다. 맡은바 죽을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고 박수칠 때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은 아름답다고 했다.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집요한 참견은 금물이다. 못미덥고 불안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불치 심치지(以不治 深治之).때로는 내버려두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목표에 미쳐 있는 사람에게 간섭하면 안 된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먹는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편견은 오버센스다. 가만히 두면 의욕에 넘치는 용기로 알아서들 더 잘할 수 있다. 교무실이자 초등학교 3학년1반 교실이었던, 그 교실 맨 뒤 높이 달려있던 종. 그 종은 사실은 종이 아니고 대포탄피였다. 어떤 이는 탱크 탄피라고도 하였는데 소리가 어찌나 맑고 고왔는지 종을 칠 때마다 타악기를 치는 기분이었다. 멀리서 교회당 종소리가 들려온다. 키 큰 종치는 아이가 발돋움을 하고 그 쪽으로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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