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병 속의 고독
유리병 속의 고독
  • 안희자 <수필가>
  • 승인 2015.07.1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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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안희자 <수필가>

불볕더위에 온몸이 달아오른다. 때마침 투명한 유리병이 눈에 든다. 물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고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잠시 더위를 잊을 것 같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봐도 미동도 없다. 어항을 두드려 본다. 금방이라도 수면위로 튀어오를 것만 같은데 기척이 없다. 얼마 후에야 조약돌 사이에서 죽은 물고기 한 마리를 발견했다. 순간‘고독’이란 서늘한 단어가 번개처럼 떠오른다.

열대어 구피(guppy)를 분양받아 키운 것이 3년이 넘는다. 처음엔 여러 마리가 어울려 살았다. 무엇보다 애착이 가는 것은 몸집이 작은데다 번식력도 왕성하고 관리하기가 비교적 쉽기 때문이다. 

구피는 나의 기쁨이자 활력소였다. 마음이 요동칠 때나 삶이 건조할 때 그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거칠게 불던 마음의 폭풍도 가라앉았다. 그뿐인가. 화려한 의상에 쉴 틈 없이 지느러미를 흔들어대는 현란한 군무는 가히 매혹적이다. 그 어느 무용수에 비하랴. 때론 날렵하게 때론 우아하게 움직이는 생명의 몸짓에는 그들만의 교감이 있다.

수컷이 암컷에게 꼬리치며 공격적으로 구애하는 모습은 독특하면서도 사랑스럽다. 그동안 새끼를 받아 식구가 늘어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것이 미물일지라도 새 생명의 탄생에 그저 신비롭고 감탄스러울 뿐이다. 어쩌다 질병에 걸리거나 물갈이에 실패하여 집단 폐사했을 때는 안쓰럽고 허탈했다. 전날 움직임이 느려지더니 겨우 한 마리밖에 남지 않은 것이 기어이 죽고 말았다.

죽은 구피를 바라보다 상념에 젖어든다. 질병 탓은 아닌 듯하다. 외로움이 그것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일까? 곁에 아무도 없으니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어 생을 놓아버린 물고기인가. 고독도 깊으면 병이 되는 것을. 작은 물고기라고 하찮게 여긴 죄가 무겁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식물뿐만 아니라 사람도 짝을 이루며 살아간다. 종족번식 본능이랄까. 연인으로, 부부로, 가족으로, 공동체로 서로 사랑하고 소통한다면 삶이 즐겁고 풍요로울 것이다. 홀로 살아갈 수 없어 신이 보내준 선물이지 않을까. 홀로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물고기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리라. 

한때는 나도 유리병 속의 물고기였다. 재작년 여름, 나는 거대한 수술방에 옮겨져 홀로 갇혀버렸다. 그 순간부터 온몸은 떨렸고, 내 입술은 가뭄으로 바짝 말라버린 농작물처럼 타들어갔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투를 벌였던 몇 시간, 그날을 기억하기도 두렵다. 그때 곁에서 내 입술을 촉촉하게 축여주던 천사 같은 수술 팀과 그들의 따뜻한 위로의 말이 생의 찬가처럼 들렸다.

고독은 공기 같은 것이어서 늘 우리 곁에 웅성거린다고 한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으나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고독이란다. 갑작스런 병고로 인해 세상과 단절되었을 때, 사랑하는 이들이 뜻하지 않게 곁을 떠났을 땐 상실감에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독을 느끼기도 한다. 삼시세끼 밥만 먹는다고 잘 사는 건 아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소통이야말로 진정 깨어있는 삶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지금까지 함께 공존하는 것은 관심과 사랑 때문이리라. 언제든 속마음을 털어 놓고 대화할 수 있는 인연들이 있기에 삶을 이어 가는 것은 아닐까.

미래의 내 삶이 저녁노을처럼 짧다 해도, 나는 고즈넉한 식물의 삶도 좋지만 동적인 물고기의 삶을 닮고 싶다. 물고기가 아롱다롱 어울려야 아름답듯이 사람도 여럿이 어울릴 때 보람이란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빈 어항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나와 맺어진 소중한 인연들이 없다면 얼마나 고독할까. 세상은 다양한 사람들이 엉켜 사는 공간이며 서로 부대끼며 성숙해지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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