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미의 바람
할미의 바람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5.07.12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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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수안 <수필가>

그렇게도 건강하던 서연이가 자주 감기에 걸린다. 어린이집에 다닌 뒤부터 생긴 일이다. 면역력이 약한 서너살배기 아기들이 서로 옮기는 통에 처음 몇 달간은 너나없이 감기에 잘 걸린다고 한다. 그 때문에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 서연이가 베란다에서 텅빈 놀이터를 내려다보며 제 어미에게 말했다.

“서연이 심심한데 친구들은 어디 갔어?”

“어린이집에 갔어.”

“엄마, 나도 어린이집 갈래.”

한 이틀은 집에서도 잘 지내더니 사흘째가 되니 감기보다도 심심한 것에 더 힘들어했다. 부랴부랴 제 어미가 데리고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친구들에게 갔으니 얼마나 재잘거리며 재미나게 놀 것인지 눈에 선하다. 

식구들이 모두 나가고 텅빈 집안은 무인도처럼 고요하다. 위층에도 집이 비었는지 발소리 하나 나지 않는다. 아침에 몸만 빠져나온 잠자리로 다시 들어가 벌렁 눕는다. 

“아이구, 좋다.”

해야 할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고 그저 멍하니 누워 무심히 천정만 바라본다. 참으로 편하다. 친구들과 놀고 싶어 기어이 어린이집으로 간 서연이와 반대로 할 것 없고, 밋밋하고, 심심한 이 시간이 참으로 좋다. 

실은 한달여 만의 휴식이다. 봄에 조금 여유를 부린 것이 화근이었다. 

일이 밀리니 하루에 할 수 있는 일도 이틀씩 걸리기 일쑤였다. 아침 장이 한가하면 저녁 장이 바쁘다고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라 스스로 혀를 차는 일이 잦았다. 겨우겨우 어제까지 급한 일을 마치고 드디어 오늘 느긋한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잔일 많은 포도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보니 늘 동동거렸다. 포도농사는 일이 많은 것은 둘째치고 까다롭기가 귀한 집 고명딸보다 한 수 위다. 조금만 신경 안 써주면 엉뚱한 길로 내달리고,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어깃장을 놓는다. 그러나 그 성격을 잘 파악해서 늘 관심을 가지고 정성을 기울이면 외관도, 맛도, 향기도 기대한바 이상의 감동을 안겨주는 이쁜 과일나무다. 

고단했지만 기쁨 또한 적지 않았던 포도농사. 그러나 FTA 체결 등의 영향으로 수입포도가 넘쳐나면서 나는 작지 않은 면적의 포도농사를 복숭아농사로 바꾸게 되었다. 포도나무에 대한 죄책감, 미래에 대한 불안, 기운 빠지게 하는 사람들의 충고…. 과수원의 형태를 바꿔야 하는 보이는 일 위에 보이지 않는 여러 요소까지 더해 몸보다 마음이 더 고단한 일이었다. 

그렇게 심은 복숭아나무도 잘 자라 이제는 어엿한 복숭아밭의 면모를 보인다. 그리고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그 어떤 일에 대한 부담도 없이 달콤한 휴식을 즐기는 중이다. 

아직 감기가 덜 떨어졌는데도 친구들이 있는 어린이집으로 간 서연이에게는 참으로 심심한 일이 내게는 너무도 귀한 휴식의 시간이다. 

하루, 일년, 십년, 이십 년….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면 서연이도 알게 되리라. 심심한 시간을 가끔 가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가끔은 심심하리만치 여유있는 시간을 갖는 삶을 살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할미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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