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저녁 바람
여름 저녁 바람
  • 이효순 <수필가>
  • 승인 2015.07.05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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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효순 <수필가>

성가 연습이 끝난 후 찾은 교회 주차공간은 해가 보이지 않는 그늘이다.

잠시 남편의 차를 기다리기 위해 지인과 함께 가로등 보호대에 앉는다.

한낮의 열기가 남아 따끈하다. 옆에 있는 야산에서 부는 여름 저녁 바람이 한낮과는 달리 상큼하다. 아직 어둠도 내리지 않은 환한 저녁. 도시에서 느껴보지 못한 신선함이 묻어난다. 금세 해가 서산으로 기울었는지 야산 뒤로 보이는 하늘이 엷게 물들었다.

텅 빈 넓은 주차공간 한 곳에 멍석이라도 펴고 싶은 마음이다. 누워 바람과 함께 어스름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싶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신선 같은 시간인가. 도시 생활 속에 분주히 보내는 일상이 모두 뒤로 밀린다. 오직 바람과 나만 풀 내음 나는 산 옆에서 누리는 호사다.

하늘과 산, 바람 그리고 나. 옆에 있는 지인도 이런 생각을 할까. 마당의 아스팔트는 한낮의 뜨거웠던 열을 뿜어낸다. 그러나 주차장 옆 소나무와 참나무가 오밀조밀한 산에서 부는 바람은 한낮의 더운 열기를 모두 날린다.

왜 자연에서는 고향 생각이 나는 걸까.

지금은 아파트 속에 다 묻혀버린 고향인데. 모습이 사라져 더 그리운지도 모른다.

고향엔 늘 외할머니가 계신다. 유난히 할머니와는 많은 시간을 지내서인지 꼭 함께 한다. 해가 지면 할머니는 아버지가 짚으로 만든 헛간 옆에 세워 두었던 동그란 멍석을 마당에 편다. 제일 먼저 그곳으로 고무신을 벗고 들어가는 것은 나였다. 누워 여름 하늘을 바라보며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손녀딸의 성화에 못 이겨 한마디 두 마디 시작하시는 구수한 이야기. 가장 많이 들었던 ‘해와 달’ 듣고 또 들어도 싫증 나지 않았던 얘기다. 그럴 땐 할머니 이야기가 내 맘에 포근히 스며들어 스르르 별을 보며 잠이 들던 기억. 초저녁별처럼 반짝반짝 떠오른다.

등 밑에 깔린 멍석은 짚으로 만들어 까슬까슬했지만 그래도 할머니 곁이라 푸근했다. 이제 내 나이 할머니의 나이가 다 되었다. 그래도 그때의 기억은 어찌 그리 오래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다. 멍석에 가득 내리던 달빛과 별빛, 지금 생각하니 아득한 그리움이 되었다.

살랑살랑 저녁 바람에 밀려오는 또 하나의 기억, 초저녁 별이다. 해가지면 반짝 서쪽 하늘에 뜨는 금성, 어느 땐 구름 사이에 숨기도 한다. 가끔 그 옆엔 초승달이 웃으며 초저녁별과 함께 다정했다. 어머니는 초승달은 부지런해야만 본다고도 하셨다.

시골생활은 여름이면 농사일에 어스름이 밀려와 어둠이 내리기까지 분주하다.

언제 하늘을 바라보겠는가. 저녁을 지을 줄도 모르던 어린 나는 서쪽 하늘에 초저녁별과 초승달을 보며 집에서 떨어진 산 넘어 밭에 가신 엄마를 기다렸다.

더러는 푸성귀를 팔러 시장에 가실 때도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동생들은 기다리다 마루에서 잠이 들기도 했다. 이젠 모두 끝이 난 영화 필름처럼 지난 시간에 감기어 버렸다.

할머니, 부모님 다 떠나시고 남은 3남매. 고아가 되었다. 그렇지만 각기 자녀들 키우고 다 갈 길 찾아 살고 있다. 이렇게 잠깐이라도 옛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아직도 바람은 살랑살랑 마음을 흔든다.

여름 저녁 바람에 내 마음도 지난 시간을 가까이 할 수 있었다. 새소리도 멈춘 이곳에 내 마음도 푹 빠졌다. 남편의 차 신호가 들린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발길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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