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속의 백제(2)
청주 속의 백제(2)
  •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5.06.28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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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고분군을 보면 송절동은 1~2세기로 추정되고 신봉동 백제고분군은 3~5세기인데 봉명동 고분군 중에는 3~4세기 고분군이 상당수가 있어서 송절동~신봉동 고분의 고리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 많은 무덤이 신봉동 자락에 자리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사집단의 공동묘역(共同墓域)이라는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다. 

5세기 후반 청주는 어수선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제가 도읍을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기는 혼란기였고 신라는 코밑까지 다가와 지금의 문의와 낭성까지 청주를 옥죄고 있었다. 또 고구려 군사들은 남성골산성이 있는, 지금은 세종시로 편입된 부용까지 내려온 정황이 보인다. 그런 틈새에서 청주 백제 세력 휘하의 군사들은 처절하리만큼 매서운 싸움을 벌여야 하지 않았을까. 신봉동 명심산에 묻힌 이들이 바로 이 싸움에서 목숨을 잃은 백제인 군사들이었다.

출토된 유물은 칼, 창, 화살촉 등 철제 무기류가 많았는데 그중 농기구도 있었지만 철제 갑옷과 투구, 화살통 등 철제 유물이 많이 나왔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또 전쟁터에서 말(馬)에게 썼던 재갈이나 등자( 子-말을 탈 때 디딜 수 있게 받쳐주는 역할을 하는 물건) 등 마구류도 많이 나와 그 당시 기마병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게 해주었다.

부장품 중 빠질 수 없고 공통적으로 발굴되는 것이 바로 토기인데 토기 표면에 새발자국 무늬를 새긴 항아리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새발자국 무늬는 ‘새’를 신성하게 여긴 토템문화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토템문화는 백제의 여러 유적과 일본의 큐슈, 긴끼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이것은 새발자국 무늬가 백제의 발전과 함께 전라도 지역으로 확산되고 일본에까지 전해진 것으로 문화의 전파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바리를 비롯하여 입이 큰 둥근 단지와 손잡이 잔이 대표적이다.

신봉동에서 출토된 토기는 속이 깊은 바리형 토기, 적갈색 연질 장란형(長卵形) 항아리와 쇠뿔 손잡이가 달린 토기인데 마치 오늘날 500cc~1000cc 맥주컵을 연상케 하는 토기처럼 다양한 모습이다. 시대가 같은 다른 지역과 또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어 ‘신봉동식토기’로 명명하였다.

신봉동식 토기는 입구가 넓은 것이 특징이다. 신봉동과 맞닿은 봉명동 백제 유적에서는 ‘대길’(大吉)이라는 새김 글씨가 들어간 청동방울 동탁(銅鐸)이 나오기도 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명문의 청동방울로 한나라 유물로도 추정되며 북쪽의 낙랑과 교류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지금 현재 청주박물관에 소장이 되어 있다.

그리고 무덤에 묻힌 사람의 가슴에는 곡옥(曲玉)이라고 해서 굽은 옥이 함께 발견되었다. 곡옥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선 설들이 구구하다. 이것은 태극기의 원형이라고도 하고 태아의 형태로 보기도 하는데 생명을 상징한다거나 우주의 근원인 인간 (태극을 소우주인 인간으로 보는)을 뜻한다고도 한다.

백제의 무덤이 이만큼 많은 지역도 청주 말고 어디에도 없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청주에 백제가 있다는 말도 나온 것이다. 

이 밖에도 백제 유물 전시관 안에는 일본 속의 백제 문화를 알 수 있는 여러 가지가 사진과 함께 모형으로 제작된 백제금동대향로가 있는데 아쉬운 대로 백제문화를 엿볼 수 있다. 또 연질토기와 경질토기편을 직접 만져보고 비교해 볼 수 있으며 찬란했던 백제 문화가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어 체험학습을 하기에 충분하다.(청주 문화기행, 재미있는 청주이야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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