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속의 백제(1)
청주 속의 백제(1)
  •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5.06.21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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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청주의 역사는 크게 선사문화와 백제문화, 서원경문화, 고려와 조선시대 문화로 나뉜다. 청주는 마한의 영역이었고 마한은 부족국가 연맹체로 54개국이 있었고 그 우두머리 국가를 월지국(月支國) 또는 목지국(目支國)이라 했다.

그러니까 마한의 맥을 이어 청주지역을 백제가 통치한 것이다. 백제는 이곳을 상당현(上黨縣)이라 했다. 삼국의 각축에 따라 청주는 상당현에서 고구려의 지배 아래 있을 당시 낭비성(娘臂城)으로 또는 낭자곡(娘子谷), 낭성으로 불렸다. 또 신라가 북진정책으로 맞서며 한강 유역까지 진출했을 때 청주는 신라에 속했고 신문왕 5년(685년)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다가 4년 후(689년) 서원경이라 불렀다.

이렇게 삼국의 각축이 심했던 이유는 청주가 아마도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였고 살기 좋은 고장이어서가 아니었을까. 가깝게는 남한강과 금강이 흐르는 한남금북정맥이 있고 아름답고 기름진 땅이 있으며 자연 풍경이 아름답다 보니 어찌 이 땅이 탐나지 않았을까. 

봉명동에서 발굴 조사된 문화유적을 보면 구석기부터 신석기, 청동기, 원삼국, 고려, 조선에 이르는 광범위한 유적이 시대별로 펼쳐진다. 시대 폭이 이처럼 넓다는 것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비옥한 땅, 미호천을 중심으로 인류가 정착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백제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청주 백제유물전시관은 백제의 문화를 보여주기 위해 백제의 무덤을 본떠서 지은 곳이다. 청주의 신봉동 운천주공아파트 맞은편에 있는 명심산 자락에는 사적 제319호로 지정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백제의 무덤 떼가 있다. 이 무덤 떼는 4~5세기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마한사람들이 백제로 편입된 후 우수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1982년부터 2014년까지 7차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3기의 석실분과 300여기의 널무덤(土壙墓 토광묘)과 덧널무덤(木槨墓 목곽묘), 화장묘와 여러 가지 부장품이 함께 발견되었다. 발굴 당시부터 무덤 떼의 규모나 다양한 매장양식이 큰 관심을 끌었는데 발견된 부장품들도 당시 백제의 대외관계와 지방통치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신봉동 백제 무덤 떼는 위쪽으로 갈수록 나중에 만든 것이며 조성 양식이나 부장품으로 보면 위쪽이 높은 사람의 무덤이다. 위쪽 무덤에 묻힌 이들의 신분이 높다는 것은 부장품으로 묻은 유물로 추측한 것이다. 위쪽 무덤에서 나온 쇠갑옷과 손잡이에 둥근 고리가 달린 긴 칼이 신분이 높은 지휘자용으로 보이는 환두대도(環頭大刀)가 함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백제 중앙의 세력과 지방 세력 사이를 잇는 권력의 고리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칼은 중국 남조에서 들여왔을 외래품으로 백제의 중앙권력자가 지방 우두머리에게 보낸 것으로 신분을 나타내는 구실을 하였다.

많은 무덤이 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점이나 부장품으로 무기류가 많이 출토된 점 등으로 보아 싸움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공동묘역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청주는 삼국시대 때 뺏고 빼앗기든 접경지역이었던 시대의 유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백제의 유적이 그만큼 청주에 많이 남아 있다. (청주 문화기행, 재미있는 청주 이야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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