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림수(鳳林藪)를 아시나요
봉림수(鳳林藪)를 아시나요
  • 박상일 <역사학박사, 청주대박물관>
  • 승인 2015.06.18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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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 박상일 <역사학박사, 청주대박물관>

얼마 전에 문학단체인 딩아돌하문예원 회원들과 함께 경남 함양지역을 답사하였다.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 학자인 정여창 선생이 살던 일두고택과 화림동계곡의 거연정 등 여러 곳을 답사하였는데, 다녀온 뒤로 며칠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머릿속을 맴도는 곳이 함양읍 교산리에 있는 상림(上林)이다. 천연기념물 제154호인 함양상림은 통일신라 진성여왕 때인 9세기말에 최치원 선생이 함양읍의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방수림(防水林)이며 호안림(湖岸林)이다. 현재 2만여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어 봄의 신록,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 등 사계절의 절경으로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함양상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이라는 역사적 가치와 함께 우리 선조들이 홍수의 피해로부터 농경지와 마을을 보호한 지혜를 알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서의 무한한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적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을 보면서 찬사와 동시에 부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필자는 상림을 거닐면서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이 청주에 있었던 봉림수(鳳林藪)이다. 

봉림수는 무심천 하류의 서쪽 천변인 운천동 일대에 걸쳐 있었던 숲이다. 이 숲에 대한 기록은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처음 나타나는데 청주의 북쪽과 남쪽에 각각 ‘북숲(北藪)’과 ‘남숲(南藪)’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숲은 청주 서쪽 5리에 있고 봉평(鳳坪)이라 부르는데 효종이 이곳에 임금에 오르기 전에 봉림(鳳林)이라 이름 붙였으며 원래는 청주 읍기(邑基)를 누르고 관방(關防)을 위하여 나무를 기르고 수호한다고 하였다. 남숲은 남쪽 5리에 있고 인평(麟坪)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폐하였다고 하였다. 남숲은 영조 때에 이미 없어진 것으로 기록되었으니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으나 대략 청주교대 주변이 아닐까 추정된다. 

북숲은 여지도서 이후의 지리지에는 명칭만 봉림수로 바뀌었을 뿐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고, 1932년에 간행된 조선환여승람에는 ‘봉림조하(鳳林朝霞)’라 하여 봉림숲의 아침노을이 서원8경의 하나로 소개되었다. 이러한 기록들에 따르면 봉림수는 일제강점기초까지 존재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구례 운조루에 소장된 청주읍성도를 비롯한 각종 청주 고지도에도 무심천 하류부분에 울창한 모습의 숲을 그려 넣고 봉림수라 표기한 것이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어서 숲의 위치와 형태를 짐작하게 해준다. 

봉림수의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청주읍기를 누르고 관방을 위하여 나무를 심고 수호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풍수지리사상에 의해 청주의 북쪽에 산이 없는 약점을 비보(裨補)하기 위한 인공림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즉 북숲(봉림수)은 배산으로 남숲은 안산으로 삼기 위해 인공의 숲을 조성한 것이다. 일설에는 이인좌의 난 때 이곳에서 병기를 상여로 가장하여 청주성에 진입하였다고 하며 가뭄 때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함양상림을 거닐면서 필자는 문득 청주 봉림수 또한 방수림과 호안림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봉림수의 위치가 무심천의 하류이고 천변의 저지대에 조성된 것은 무심천 범람에 대비한 것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다시 말해 봉림수는 풍수비보에 따라 청주의 배산으로 조성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심천이 범람할 경우 유속을 줄이고 둑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봉림수가 지금까지 보존되었다면 함양상림에 못지않은 천연기념물이며 청주팔경의 한 곳으로서 청주시민의 휴식과 치유의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요즘처럼 가뭄이 심할 때는 기우제도 지낼 것인데 생각할수록 아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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