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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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5.06.16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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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나는 ‘인성교육’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난감해진다. 인성을 가르치라는데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가르치란 말인가? 그것도 현대의 교육시스템 안에서 말이다.

우리의 교육은 경쟁 일변도였다. 그 정점에 대학입시가 있었다. ‘좋은 대학을 가라’고 하지 ‘좋은 인격을 갖추라’고 말하지 않는다. 좋은 대학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말을 바꾸면 수능점수가 높은 사람이 인격등급이 높은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좋은 대학’과 ‘좋은 인격’을 헷갈려한다. 좋은 대학 다니는 사람은 좋은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부지불식간에 착각을 한다. 다시 말해, 좋은 인격에 우리는 좋은 대학을 슬그머니 집어넣고 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도덕적으로도 완성될 가능성이 높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도덕적으로 완성되면 이득이 있다는 판단 아래 벌어지는 현상일 수도 있다. 머리가 나쁜 사람이 도덕적으로 완성될 가능성이 낮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머리 나쁜 사람에게 사회적 책무를 과중하게 맡겼을 때야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도덕과 지성은 전통적으로 그 연계성을 확보 받지 못했다. 오히려 ‘지성의 도덕화’가 철학자들의 오랜 꿈이었다. 거꾸로 ‘도덕의 지성화’가 과연 철학적 주제가 된 것은 현대의 공리주의에 와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윤리학설에서 이른바 공리주의(功利主義)는 현대의 우리가 쓰는 말로 하자면 ‘효율주의’(utilitarianism)에 해당된다. 유틸리티(utility)만 좋으면 좋은 것(good)이라는 것이다. 우리말에서는 ‘공리’(功利: 公利가 아니다)는 이미 죽은 말이기 때문에 효율주의라는 번역이 더 맞다. 효율이 좋은 것이 도덕적으로 선하다? 이런 주장은 현대, 정확히는 벤담 이후에야 떠드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의 지성화를 넘어 도덕의 산술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서구정신의 ‘양화’(量化: quantification) 정신과 상통한다. 숫자로 표기되는 도덕의 양인 셈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부모에게 잘하면 7젼, ‘부인한테 잘하면 5젼, ‘친구한테 잘하면 3젼, 이렇게 따지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지성의 도덕화는 늘 주제가 되어왔다. 배운 놈 가운데에서 나쁜 놈이 많기 때문이다. 아니, 머리 좋은 놈들이 나쁜 짓도 잘 하기 때문이다. 지성이 높다 해서 도덕이 높다는 논리적 필연성이 없기 때문에, 지성을 도덕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철학자의 숙제였다. 

도덕화의 방법은 단순무식한 것이 많았다. 이를테면 ‘삼강오륜’(三綱五倫) 외우기 같은 것이다. 군신관계, 부자관계, 부부관계의 위계(A는 B의 기준이다: A爲B綱)를 설정한 다음, 가족끼리의 정감, 정치에서의 의리, 부부 각자의 역할, 세대 간의 순서, 친구사이의 믿음을 강조했다. 맹자가 강조한 이후로 유교국가에서는 바로 이 오륜-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이 윤리의 요체가 된 셈이다. 

그렇다면 인성교육은 과거의 3강5륜의 강조 외에는 없는가? 인성이란 인간성이고, 인간성 좋다는 것은 사회적 책임감이나 개인적 성실성을 바탕으로 한 ‘신뢰, 덕망, 양보, 희생’ 등의 덕목이 갖춰짐을 말할 텐데, 어떻게 이 많은 것을 담는다는 말인가? 

이런 와중에 그제 다녀온 교도소인문학 강의에서 일말의 단초를 얻었다. 교도관이 또다시 ‘인성교육이 정말 필요하다’고 하기에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너무도 간단히 답해주는 것이 아닌가? ‘다양성입니다. 왜 죄를 짓나요? 자기 식으로만 생각해서 그렇지요. 남이 나와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만 알려주어도 됩니다.’ 내가 인성교육을 받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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