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낮잠
초여름 낮잠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5.06.15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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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여름이 되면 생각나는 것 중의 하나는 아마도 낮잠일 것이다. 낮이 길고 더위가 본격화되면서 사람들 몸은 아침 한나절이면 지치게 마련이다. 이 때 시원한 그늘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이고 자는 낮잠은 어느 보약보다도 효험이 있고 설탕물만큼이나 달콤하다. 그러나 낮잠을 아무나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낮잠은 몸은 곤해도 마음이 한가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귀한 손님인 것이다. 송(宋)의 시인 양만리(楊萬里)도 낮잠이 찾아올 만한 위인이었던 모양이다.


◈ 한가히 사는 초여름 오후에 잠에서 깨어 일어나2(閑居初夏午睡起2)

松陰一架半弓苔(송음일가반궁태) : 솔 그늘 아래의 시렁에 반궁 정도 이끼 끼고 
偶欲看書又懶開(우욕간서우나개) : 우연히 책을 보려해도 또 펴기조차 싫어진다
戱掬淸泉洒蕉葉(희국청천쇄초엽) : 재미로 맑은 샘물 손으로 떠다 패초잎 씻어주니
兒童誤認雨聲來(아동오인우성래) : 아이들은 빗소리로 잘못 알고 달려나온다 

※ 초여름 한낮, 시인은 달콤한 낮잠에서 막 깨어났다. 시인이 낮잠을 청한 곳은 아마도 소나무 그늘 아래였던 것 같다. 낮잠에서 눈을 뜨자마자 맨 처음 눈에 띈 것이 솔 그늘이었으니 말이다. 솔 그늘 아래 시렁이 하나 달려 있는데, 그 위에는 이런저런 가재도구들 대신 이끼가 반궁(半弓) 즉 육척(六尺)만큼이나 높게 앉아 있었다. 변변한 살림살이 하나 없이 사는 시인의 소박한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여름 한낮에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소나무 그늘이었던 것이다. 

시인은 그곳에서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유유자적하며 초여름을 즐기고 있는 듯하다. 세상의 번잡한 일들은 모두 물린 지 오래다. 간혹 우연한 계제에 책을 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막상 책을 잡으면, 그것을 펴는 일조차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마음껏 게으름을 피워본다. 그러다가 무료해지면, 재밋거리를 찾는다. 

맑은 샘물을 손에 한 웅큼 쥐어다가 파초 잎에 뿌리는 것도 시인이 재미 삼아 하는 일일 뿐이다. 시인이 파초 잎에 물 뿌리는 소리를 아이들은 비 오는 소리로 알아듣고는 밖으로 뛰어 나온다. 초여름 한낮,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자다 깨어, 책을 볼까 하다가 이내 그만 두고, 장난삼아 손에 샘물을 한 웅큼 쥐어다가 파초 잎에 뿌리는 시인의 모습에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가 읽히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여기에 비가 오는 줄 알고 밖으로 뛰쳐나오는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모습이 더해지고 있으니, 참으로 한가하고 여유로운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세계라고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초여름에 접어들어, 날이 적당히 더워졌을 때, 소나무 그늘 아래 놓인 평상 위에 편안하게 누워 낮잠을 자는 것은 이 계절에만 누릴 수 있는 호사가 아닐 수 없다. 낮잠을 통해 세상의 모든 잡념들을 떨쳐버리고, 딱히 무얼 하고자 하는 생각마저도 마음에서 비워낼 수 있다면, 이러한 낮잠은 단순한 낮잠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낮잠은 세파에 찌든 사람들을 무념무상의 경지로 안내하는 통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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