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백목련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1.08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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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후
정 상 옥 <수필가>

만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바다를 향한 그리움은 끝내 아무런 채비도 없이 무작정 길을 나서게 했다.

넓은 도로위에 빼곡히 늘어선 차량행렬은 서로 먼저 가려 재촉하는 사람들의 조바심으로 분주하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 내 사는 모습이다.

대관령 휴게소에 들러 커피 한 모금 입에 물고 고갯마루에 서서 목적지까지의 얼마 남지 않은 길을 내려다본다. 설렘에 가슴은 뛰고 그리움으로 불타던 열정은 온몸의 혈기에 불을 붙인 듯 뜨거워졌다. 고갯마루 아래로 펼쳐진 강릉 시가지와 설악산 자락의 경관은 장엄하고 웅장하며 초자연적인 엄숙함을 지녔다. 큰 덕을 품은 것 같은 산이 지닌 위엄 앞에 서서 어찌 무모한 인간이 입을 열어 감히 평을 하겠는가. 다만 산의 품은 뜻을 헤아리려 노력할 뿐…. 그러나 방금 전까지 쾌청한 하늘아래 초록의 물결이 넘실대던 산등성이로 희뿌옇고 산채만 한 구름이 순간 밀려들었다. 금세 큰 산속에 든 작은 인간을 순식간에 휘어 감고 지척을 가두어 버렸다. 눈앞에 펼쳐진 갑작스런 기후의 변화 앞에서 장관이라 표현해야할지 신비롭다고 해야할지 나약한 심성은 두려움마저 일었고, 감당할 수 없는 정경에 넋을 잃었다.

장엄했던 구름은 다시 정처 없이 흘러가다 산을 휘어 감기도 하며 순식간에 사라지고, 흩어진다. 얽매이지 않고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으며 과한 욕심내지 않는 평등의 흐름이다. 조급하고 이기적인 인간에게 장엄한 산이 정복을 쉽게 허락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순리가 아니었나! 한 치 앞도 모를 생에 오만한 허욕과 다급함만으로 달려온 여심(女心)을 뒤로한 채 또 어느 곳의 아침을 밝히러 떠나가는 석양은 황혼의 고운 노을빛만 풀어놓은 채 유유히 설악산을 넘어섰다.

바다는 그 언젠가처럼 변함없이 그곳에 있었다.

빽빽한 송림사이로 불어오는 해풍을 먼저 안으며, 넓고 푸른 바다의 부서지는 하얀 포말에 허허로운 가슴을 묻었다. 상큼한 바다의 체취에 취하여 아름다운 노을이 파도위에 그림자로 내릴 때까지 한참 동안 그렇게 도취되어 있었다. 그리던 바다와의 해후는 그렇게 속초에서 이루어졌다. 내 삶 속의 무안한 행복이었다.

바다는 아무런 거부 없이 모든 사람들을, 고깃배를, 갈매기를 넉넉한 가슴에 품고 있었다.

금모래 한 움큼 집어 들었지만, 고운 모래는 손바닥 안에서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손가락 사이사이로 다 빠져 버렸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잊어야 할 것을 쉽게 단념하지 못하는 지독하고 질긴 삶의 미련이다. 내 삶 속에 잠재돼 있는 허욕이 바람결에 날리고 있었다.

넓고 푸른 바다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했다. 삶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살라하지 않았다.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던 잠재된 욕망은 구멍난 물동이처럼 아무리 채우려해도 채워지지 않는 허허로움과 갈증만을 남겼음에도 뒤돌아보지 못한 어리석은 뒤안길이여!

바다의 넓은 품을 떠나며 물빛만큼이나 푸른 가슴으로 언젠가 다시 맞을 해후를 약속하고 삶의 혜안을 찾아 떠나는 여정인양 비상하듯 대관령을 넘었다.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무언으로 들려준 바다와의 만남으로 한없이 겸손하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리라는 기도를 마음에서 올리며 집을 향해 돌아오는 발길은 가벼웠다.

바위틈을 비집고 피어난 산국의 향기가 가을 햇살을 받고 더욱 짙게 흩날리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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