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을 사랑한 사람
들꽃을 사랑한 사람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5.06.14 19: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수안 <수필가>

나뭇잎은 까딱도 하지 않는다.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폭염은 사람뿐만 아니라 나무들도 지치게 한다. 가뭄도 심상치 않다. 저수지는 바닥나고 농작물이 신음한다는 뉴스가 자주 보도된다. 손 놓고 바라만 봐야 하는 농부의 마음도 농작물과 함께 타들어 간다. 

다행히도 우리 지역에는 관수 시설이 잘되어 있어 원하는 양의 물을 언제든 줄 수 있다. 풀을 못 자라게 하려면 물을 안 주는 것이 맞지만, 지금은 과일의 크기를 결정하는 세포분열기라 그럴 수가 없다.

밸브를 열고 스위치를 올린다. 모터가 돌아가고 물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보슬비가 내리는 것처럼 포도나무와 복숭아나무 뿌리를 적신다. 배고픈 아이 입에 젖을 물린 것처럼 흡족하다. 그리고 문득 한 사람이 생각난다. 과수원이 밀집한 우리 지역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관수 시설을 추진해 가뭄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놓고 거짓말처럼 우리 곁을 훌쩍 떠나버린 사람….

그를 만난 것은 음성 예총 수필 창작반에서였다. 큰 눈에 조용한 미소를 지닌 그는 들꽃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소박한 들꽃을 소재로 사진을 찍고 글을 썼는데, 미미한 들꽃에서 일반인이 놓치는 특별한 아름다움을 발견해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작정하고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꽃도 그가 글의 소재로 쓰면 새로운 이미지로 태어나고, 그다지 고와보이지 않는 꽃도 그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렌즈에 담아내 우리를 감동 시키고는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힘없는 계층의 사람을 염려하고 아낀 그의 인간애가 조그마한 들꽃에서 작품의 소재를 찾고 의미를 부여하게 하지 않았나 싶다. 

알아갈수록 신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은 역사, 고전, 식물 등 여러 분야에 놀라우리만치 해박한 지식이 있다는 것이었다. 무엇이든 물어보면 마치 백과사전처럼 정확하게 설명해 주었는데, 우리가 상상하는 일반 공무원이 아니라, 마치 전문 분야의 학자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그를 알게 된 무렵에 우리 동네에는 큰 공사가 진행되었다. 우리 지역 일대의 모든 농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대형 관수시설 공사였다. 굴착기가 몇 대씩이나 땅을 파고, 덤프트럭이 분주히 오가고는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필창작반에서 만난 그 백과사전의 주인공은 음성군청 농정과에서 근무하는 사람이었다. 중앙정부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해 확보한 예산으로 진행된 사업에서 그가 실무자였다. 집 한 채 짓는 작은 공사도 마음 써야 할 부분이 많거늘, 그 엄청난 공사를 하면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오죽 많았으랴. 그러나 헌신적으로 그 사업을 잘 마무리해 준 덕분에 이후 이곳 농사꾼들은 가뭄 걱정 없이 농사를 짓고 있다. 

문우의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농사꾼의 입장에서도 그는 오래오래 우리 곁에서 함께해야 할 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독한 병마는 그를 우리 곁에서 앗아 가버렸다. 

그는 떠났지만 지금도 그의 정원에는 온갖 종류의 들꽃이 계절마다 다보록이 꽃을 피운다. 그의 아내가 들며 나며 손길 주고 눈인사 나누며 정성을 들인 까닭이다. 자기가 기울이던 그 정성으로 들꽃을 가꾸는 아내를 보며 하늘에서 그가 빙긋 웃을 것만 같다. 

한발이 심할 때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사람, 들꽃 같은 미소로 주위를 편하게 하던 사람, 지금은 우리 곁에 없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에서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는 그를 만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