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에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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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숙희 <문화관광해설사·아동문학가>
  • 승인 2015.06.14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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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박숙희 <문화관광해설사·아동문학가>

마음의 문을 열고 더 자세히 직지 책 속에 오묘한 이치를, 가진 것 없이 줄 수 있는 삶으로 반추하려는, 그 서른여섯 번째 이야기는「직지」하권 26장 등등화상(騰騰和尙) 요원가다. 전문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부산 화엄사 주지 각성 스님의 ‘직지’번역 및 강해(1998년) 등을 참조했음을 밝힌다.

등등 화상 요원가는 

도를 닦음에 도를 닦을 것이 없고/ 법을 물음에 법은 물을 것이 없다.

미한 사람은 색이 공한 줄을 알지 못하나/ 깨달은 사람은 역과 순이 본래 없다.//

팔만사천의 법문인 지극한 이치가/ 마음에서 떠나지를 아니하니

자가의 성곽을 알아 취하고/ 부질없이 다른 고향을 찾지 말라.//

널리 배우거나 많이 들으려 하지 말고/ 변재와 총명, 준수를 바랄 것 없네.

달이 크고 작은 것도 모르며/ 해의 남은 윤달도 상관하지 아니하네.//

번뇌가 바로 보리이며/ 깨끗한 꽃이 흙탕물에서 나네.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하느냐 하고 물으면/ 능히 그 사람과 더불어 말하지 아니하네.// 아침 일찍 죽으로 굶주림을 채우고/ 점심때에 다시 한 차례 밥을 먹네.//

오늘도 임운 하여 등등하고/ 내일도 임운 하여 등등하고

마음속에 분명하게 모두 알고 있으나/ 그냥 거짓 어리석은 바보짓을 하네.

元은 본래의 마음자리이니 그를 요달하는 노래란다. 본래는 道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이고 법이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란다. “일체 말이 없다.”라고 한 어느 스님의 말씀처럼 ‘道可道면 非常道라’, 도를 도라고 하면 그 도는 진실한 도가 아니라 벌써 변질된 도라는 것이다. 이는 도를 닦아도 도는 닦을 것이 없고 법을 물어도 법은 물을 것이 없다는 본래 眞空 자리라는 것이란다. 

색공이 없다는 말과 逆順(역순)이 없다는 말은 같은 것이란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을 역이라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순이다. 기분이 좋으면 순이고 기분이 나쁘면 역이라는 것이겠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에게는 기분 나쁘고 기분 좋은 역순이 본래 없다는 것이겠다.

이는 참선해서 無心이 된 사람, 道만을 전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달이 가는지 시간이 가는지 날짜가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 세상에는 많은 이들이 똑똑한 척, 잘 난 척, 아는 척 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뭐든지 첨단을 걷고 싶어 한다. 돈도 그렇고 지식도 명예도 권력과 부귀도 첨단으로 가려고 하지, 제일 못 난 척하기가 어려운가 보다.

과연 인간다운 삶을 어떻게 말 할 수 있을까. 공상과학소설의 대가인 레이브래드버리의 소설‘화씨 451도’에 나오는 주인공의 직업은 책을 불태우는 방화수란다. 만약 책 대신 스크린으로만 가득한 세상이 온다면 즉 아무도 책을 읽으려 하지 않고 읽어서도 안 되는 세상이 있다면 어떻게 될는지.

작금을 사는 우리들은 책을 얼마나 자주 읽는지?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평균적으로 한 달에 한권이 채 되지 않는 수준이란다. 

역사적으로 책을 금지한 사례가 여럿 있었다는데 그중에서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이었던 진나라의 분서갱유가 대표적이란다. 미국의 사회평론가 댄 블룸은 컴퓨터와 인터넷에 매달리는 젊은이들을 ‘스크린 에이저(screen ager)‘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렇게 말초적인 자극에 도취해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은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고민도 하고 생각도 할 수 있는 독서와 산책 그리고 명상에 매달려 봄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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