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연못
초여름 연못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5.06.08 18: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일년 중 동식물을 막론하고 생명 활동이 가장 왕성한 때를 꼽으라면 단연 초여름일 것이다. 개화(開花)와 발아(發芽)의 봄이 생명 활동의 준비 단계라면 녹음방초(陰芳草)의 초여름은 본격적인 생명활동으로의 진입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아무리 늦된 초목이라도 연록(軟綠)의 앳된 티를 벗고 제법 거뭇거뭇해진 초록의 성숙한 빛을 띠게 된다. 대부분의 초목이 꽃이 지고 결실을 시작하는 이때에 장미는 비로소 짙푸른 잎 사이로 농염한 꽃을 피우니 초여름의 여왕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당(唐)의 시인 두목지(杜牧之)는 이러한 초여름의 풍광을 만끽하는 호사를 누릴 기회가 있었다. 

◈ 제안군의 뒷못(齊安郡後池)

菱透浮萍綠錦池(능투부평녹금지) : 마름 부평초 뚫고 나온 푸르고 잔잔한 못
夏鶯千囀弄薔薇(하앵천전롱장미) : 여름 꾀꼬리 수없이 울며 장미를 희롱한다.
盡日無人看微雨(진일무인간미우) : 종일토록 가랑비 보는 사람 아무도 없고
鴛鴦相對浴紅衣(원앙상대욕홍의) : 원앙이 마주 보고 붉은 옷을 씻고 있어라.

※ 시인이 무슨 일로 제안군(齊安郡)이라는 곳에 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지인(知人)을 만나러 갔을 테지만 시인이 정작 만난 것은 지인(知人)이 아닌 뒤뜰 연못에 집약적으로 모여 있는 초여름 풍광이었다. 적당히 덥혀진 초여름의 연못 물은 마름과 부평초가 그 윗자리를 다투는 각축의 장이다. 

그 풀들이 경쟁적으로 뿜어내는 초록빛으로 말미암아 연못은 녹색 비단을 두른 성장(盛裝)의 자태를 뽐낼 수 있게 되니 연못으로서는 그 풀들이 여간 반가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연못 위를 덮은 초록 비단에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가 싶더니 어디선가 들리는 새 소리가 시인의 관심을 앗아갔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꾀꼬리였다. 

초여름의 생기를 소리로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꾀꼬리는 쉬지 않고 우는 것이 천 번은 족히 되는 것 같았다. 자연스레 시인의 시선은 꾀꼬리로 옮겨갔다. 꾀꼬리를 찾던 시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초여름 여왕의 자태를 뽐내는 장미였다. 꾀꼬리가 그렇게 쉬지 않고 울었던 것은 장미의 아름다운 자태에 매료되어 그 감흥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여름 연못에 또 하나의 귀한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초여름의 생기를 더욱 무르익게 만들어주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종일토록 연못의 가랑비를 본 사람은 시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복잡한 인간사와는 철저히 유리된 청정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랑비를 모두가 다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한 쌍의 원앙새가 서로 마주보며 연못 위로 떨어지는 빗물에 몸을 맡겨 붉은 깃털을 말끔히 씻어내고 있었다. 

마름이며 부평초며 꾀꼬리며 장미며 가랑비에 깃털을 씻는 원앙새는 생기 넘치는 초여름의 풍광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전부 포용하는 연못은 한가하고 생기 넘치는 초여름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전시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