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리딩으로 ‘싱아’ 읽기
슬로 리딩으로 ‘싱아’ 읽기
  • 김주희 <청주 수곡중학교 사서교사>
  • 승인 2015.06.08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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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권하는 행복한 책읽기

김주희 <청주 수곡중학교 사서교사>
몇 달 전 EBS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슬로 리딩’이라는 아주 흥미로운 독서교육 방법을 소개했다. 일본의 나다 학교 교사 하시모토 씨는 1950년대 초반부터 ‘은수저’라는 작품을 갖고 슬로 리딩 교육을 시작했다. 변두리의 이름 없는 학교였던 나다 학교는 하시모토 교사의 슬로 리딩 교육법에 힘입어 1960년대 말 도쿄대 최다 합격자 수를 배출하는 성과를 이뤘고, 하시모토 교사로부터 수학한 제자들은 현재 일본을 이끌어가는 요직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슬로 리딩은 한 책을 깊이 있고 정성스럽게 읽는 방법이다. 학생들의 사고를 확장할 수 있는 좋은 책을 선정한 뒤 천천히 책을 읽어 나간다. 생소한 단어가 나올 때는 사전을 찾아보고, 인물이 겪은 소소한 일들을 재현해보고, 책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관련 자료를 갖고 탐구해보기도 한다. 책과 관련된 체험학습을 떠나고, 저자가 실제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따라가 본다. 오감을 활용한 살아있는 교육이 이루어진다. 

EBS에서 시도한 프로젝트는 일본 나다 학교에서 이루어졌던 슬로 리딩 교육법을 우리나라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적용해보고 학생들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프로젝트팀은 슬로 리딩 교재로 적합한 책을 선정하기 위해 전국의 교사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고, 설문조사 결과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이하 ‘싱아’)’를 선정했다. ‘싱아’는 작가의 실제 성장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며, 일제 강점기에서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시대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책을 펼칠 때마다 아름다운 우리말이 가득하며, 자세한 묘사로 상상력을 자극한다. 사람이 느끼는 감성을 이렇게 글로 표현할 수 있구나를 느끼게 하는 책이다. 

‘싱아’ 책을 읽으면 독서 훈련이 충분히 되지 않은 사람도 책의 장면이 떠오르거나 또는 소리로 들리는 경험을 맛볼 수 있다.

‘채찍처럼 세차고 폭포수처럼 시원한 빗줄기가 복더위와 달음박질로 불화로처럼 단 몽뚱이를 사정없이 후려치면 우리는 드디어 폭발하고 만다. 아아, 그건 실로 폭발적인 환희였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미친 듯한 환호성을 지르며 비를 흠뻑 맞았고, 웅성대던 들판도 덩달아 환희의 춤을 추었다. 그럴 때 우리는 너울대는 옥수수 나무나 피마자나무와 자신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한여름의 갑작스런 소나기를 맞는 촉각이 느껴지고 세찬 비와 곡식들의 힘찬 움직임이 소리로 들린다. 들판의 곡식들이 생기있게 솟아나는 그림도 펼쳐진다.

책의 말미에서 작가는 일제 강점기와 6.25를 겪으면서 경험한 시간을 글로 남겨야 할 책무를 느끼면서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했다. 메르스 전염병 때문에 세상이 뒤숭숭하다. 우리 민족이 겪은 가장 혼란했던 시기를 그분의 정갈한 인품을 떠올리게 하는 안정감 있는 문장들과 통찰력으로 따뜻하게 풀어낸 이 책을 천천히 그리고 정성스럽게 읽으면서 우리에게 절실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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