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일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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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영호 <시인>
  • 승인 2015.06.04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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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 앞에서

반영호 <시인>

외국에서 한국인이 사는 집을 쉽게 알아내는 방법 중 하나가 화단이다. 화단에 꽃이 아닌 고추나 상추 같은 채소가 심겨져 있으면 십중팔구 한국인 주택이다. 화단뿐 아니라 주변 작은 공터라도 있으면 여지없이 일군다. 

옥상이나 볕 잘 드는 베란다에도 스티로폼 박스에 흙을 담아 쌈채를 화초처럼 가꿔먹는다. 한국인의 부지런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단면이다. 올봄 화단에 꽃 대신 채소를 심었다. 씨앗으로 뿌린 것이 아니라 포토에 기른 묘를 샀다. 고추와 상추를 10포기씩. 오이, 가지, 호박, 수세미, 조롱박은 3포기씩을 심었다. 

욕심은 있어 화단은 조막만 한데다가 이것저것 심자니 오밀조밀 너무 달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씨앗을 사다가 직파를 했다. 요령을 몰라 애를 먹었다. 꽃밭이었던 만큼 꽃 싹이 많이 텄다. 봉숭아, 채송화, 맨드라미, 분꽃, 꽃잔디, 다알리아 등 무수한 꽃이 돋는다. 

전엔 이 화단의 주인들로서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던 존재들이었으나 채소밭으로 바뀐 지금은 환영받지 못하는 잡풀로 취급되어 무참히 뽑힌다. 화무십일홍. 본래부터 꽃들이 타고난 숙명이 아니던가? 자주 권력의 비정함과 비유가 되기도 한다.

다른 채소와 달리 상추는 금세 자랐다. 심은 지 보름 만에 수확이 가능하였다. 그런데 채소 묘를 사면서 서비스랄까? 인심 좋은 시골할머니가 덤으로 얹어 준 당귀 한 포기가 있다. 당귀(當歸). 세 개의 대궁에 세 잎의 잎을 달고 세 개의 뿔이 솟아있다. 서양 사람들이 러키세븐, 7자를 좋아하듯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3인데, 당귀야말로 3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본래 약초로 널리 알려진 당귀는 유달리 한약 향이 진하다. 대개 쌈채는 잎이 넓은 게 특징이다. 그래야, 밥을 얹고 쌀 수가 있다. 잎이 3잎으로 갈라진 당귀 잎만으로는 쌈을 싸기 어려워 다른 쌈채와 함께 뭉쳐 싸먹어야 한다. 무엇보다 향이 무지 찐하다. 한 조각 그야말로 손톱만큼만 넣어도 입안이 환하다. 깻잎 향이 짙지만, 당귀에 비할 수 없다. 당귀를 만진 손에는 오래도록 한약 내가 가시지 않고 남는다. 출근할 때 손에 묻히면 하루 종일 상쾌한 기분을 유지시켜준다. 잎은 쌈으로 먹고 줄기를 차 안에 두면 방향제 구실을 톡톡히 한다. 당귀로 차를 끓여 마시면 혈관의 수축력을 높여 주고 피의 흐름이 잘 통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당귀(당할當, 돌아갈歸), 전쟁에 나간 남편도 당연히 집에 돌아오게 한다는 말이 있다. 살벌한 전쟁터에서도 용감히 싸워, 승전하여 돌아오게 한다는 당귀. 옛날 전쟁에 나가는 남편에게 부인이 이것(당귀)을 품에 넣어주고 수시로 먹게 하면 전쟁에서도 늠름히 싸우고 전쟁에서 승리하여 당당히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는 당귀다.

당귀와 같은 이가 있다. 내적인 성격이면서 평소 말수가 없고 수줍음이 많은 분, 성악가로 음악회장을 맡고 있는데 꼭 할 말이 아니면 쉽게 입을 떼지 않는다. 그런 이가 어찌 단체를 이끌어 가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비법이 있을법하다. 회의란 본래 딱딱한 자리. 딴엔 화기애애하게 진행해 보려고 노력해보지만 신중해야 할 의안을 앞에 놓고 쉽지 않은 일이다. 회의장은 늘 팽팽한 긴장상태에서 열띤 토론으로 신경들이 곤두서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회의장 분위기가 확 바뀌는 일이 벌어질 때가 있다. 바로 그의 예기치 못한 말이 터지면서 웃음바다가 되기도 한다. 의제와는 전혀 다른 뚱딴지같은 이야기도 그렇거니와 억양이 생소하기 때문인데, 높여야 할 곳은 낮고 낮아야 할 톤은 높여 말하고 또 대화체가 아닌,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나. 개그맨들 말투와 같아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것이다. 소프라노로서 마치 노래를 부르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의 직업 습성이 만들어내는 언어다. 그러면 딱딱했던 회의장이 금세 환해진다. 꼭 당귀의 찐한 향을 맡는 기분이다.

오늘 저녁 의제가 무겁다. 하지만, 그가 참석하는 회의이니만큼 한바탕 웃음꽃이 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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