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푸른 시가 익어가는 계절
6월, 푸른 시가 익어가는 계절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5.05.3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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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한국 현대사에서 6월보다 더 절절한 가슴에 와닿는 계절은 없다.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청춘들이 이름도 낯선 계곡에 육신을 눕히던 서러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6월 조국의 상징.

일찌감치 찾아 온 폭염과 계절의 의미를 상실한 민주주의의 수고로운 이름으로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를 내달리던 청춘의 핏발 선 눈동자와 그걸 막아서는 또 다른 청춘들의 대치에서 무너져 내린 가슴의 서러움 역시 6월의 여전히 살아있는 이름.

그뿐이랴. 지금은 기억조차 의미 없음이나, 푸른 빛깔을 털어내고 누렇게 익어가던 보리밭과 황토 빛 흙먼지에 눈이 쓰리던 보릿고개의 배곯음과 서럽도록 청량해지는 나무이며 풀잎들의 청정함도 그만큼 찬란한 서글픔으로 젊은 가슴을 아리게 했으니….

한 해 허리가 접힌다/ 계절의 반도 접힌다/ 중년의 반도 접힌다/ 마음도 굵게 접힌다// 동행길에도 접히는 마음이 있는 길/ 헤어짐의 길목마다 피어나던 하얀 꽃/ 따가운 햇살이 등에 꽂힌다. <목필균. 6월의 달력>처럼 세월의 절반으로 치닫는 서글픔과 아쉬움, 그리고 그 치열함의 사이에서 6월을 푸른 시가 익어가는 계절로 약속하며 시작하는 첫날이다.

6월에는 더 많은 시를 읽고 노래하자. 성숙해진 포플러 나뭇잎들 바람에 흔들리며 찰랑찰랑 소리 내는 기쁨 놓치지 말 것이며, 이르게 떨군 꽃잎 잿빛 포도(鋪道)에 함부로 나뒹구는 아카시아의 서러운 향기를 혹여 잊어버리는 무심함을 안타까워하며 6월을 맞을 일이다.

그리하여 절반의 계절 6월. 한반도는 중립의 초례청이 되어 아사달과 아사녀가 마침내 합방을 하고, 민주주의는 짙게 농익어 앵두처럼 상큼함으로 우리 가슴 청량하게 하는, 항쟁의 아름다운 장면들이 오래오래 기억되는 나머지 절반으로 이 땅을 풍요롭게 하나니.

핏빛 6월은 잔잔한 서정시로 순치시키고, 푸른 산하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게서 더 치열한 박동이 느껴지는, 그런 시가 풍성한 6월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나무여, 나는 안다/ 그대가 묵묵히 한 곳에 머물러 있어도/ 쉬지 않고 먼 길을 걸어 왔음을// 고단한 계절을 건너와서/ 산들거리는 바람에 이마의 땀을 씻고/ 이제 발등 아래서 쉴 수 있는/ 그대도 어엿한 그늘을 갖게 되었다/ 산도 제 모습을 갖추고/ 둥지 틀고 나뭇가지를 나는 새들이며/ 습윤한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맑고 깨끗한 물소리는/ 종일토록 등줄기를 타고 흐르며/ 저녁이 와도 별빛 머물다가/ 아파리마다 이슬을 내려놓으니/ 한창으로 푸름을 지켜 낸 청명은/ 아침이 오면 햇살 기다려/ 깃을 펴고 마중길에 든다// 나무여, 푸른 6월의 나무여. <카프카, 6월의 나무에게> 이제 우리는 한 해의 절반을 살아남을 것이고, 또 남은 절반을 좋은 일로만 기억되기를 바라며 기대할 것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전쟁의 깊고 커다란 상처와 민주주의의 타는 목마름이 6월을 들뜨게 할 것이고, 또 너무도 당연히 일찍 찾아 온 폭염에 시달리며 청량을 그리워 할 것이다. 그리고 또 늘 그렇듯이 풀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며, 더 치열해지는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그저 지나칠 6월의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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