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여름
다시, 여름
  • 최 준 <시인>
  • 승인 2015.05.28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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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 앞에서

최 준 <시인>

잠을 깨어 머리맡의 시계를 보니 오전 아홉 시. 아파트 베란다 창문을 열어 놓고 돌아서는데 어깨 너머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린다. 걸음을 멈추고 지상에서 10층까지 또렷하게 들리는 소리의 정체를 확인한다. 부우우웅~. 10층 허공까지 먹먹하도록 요란한 소독차의 분사기가 내는 소리다. 

몸을 돌려 베란다에 붙어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앞 동이 안개가 낀 것처럼 부옇게 흐려 있고 꽁무니에서 소독액을 연신 내뿜으며 아파트 단지를 순회하는 소독차가 보인다. 

‘여름이 왔구나!’

해마다 듣던 소독차 소리가 올해도 다시 등장했다. 여름과 여름 사이에 끼어 있는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이 언제 지나갔는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분명히 지나왔건만 몸은 지금 낮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는 여름을 맞고 있다. 한 해의 정점에 당도해 있다. 

보름 쯤 전에 집에서 입던 긴소매와 긴 바지를 옷장에 집어넣고 반팔과 반바지를 꺼내 입었다. 들려오는 소식들을 보면 세상은 지난 여름과 그다지 달라진 게 없어 보이는데 계절은 정직하게 자연의 섭리를 좇아가고 있다. 

신기하다. 인간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바쁘기만 한데 계절은 제때가 있다. 앞만 노려보고 내달리는 일방적인 질주가 아니라 순환이다. 회귀의 시기를 스스로 안다. 불가시적인 엄청난 크기의 지우개로 작년을 지우고 새로운 세계를 정연하게 열어 놓는다. 

그러고 보니 오직 지상의 인간만이 계절을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더우면 더위를 막고 추우면 추위를 막고 계절을 늘였다 잡아당겼다 자연의 섭리와 줄기차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참 이기적이다. 아니면 독보적인가.

지리적인 혜택을 받은 것인지 문을 열어 놓으면 시원해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 오면서 가져온 선풍기를 네 개의 여름이 지나는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선풍기는 다용도실에서 오래도록 휴식 중이다. 

아무려나, 올 여름은 어떨지 모르겠다. 유월이 되기도 전에 폭염특보가 내리고 한낮에 거리에 나서면 이글거리는 태양을 눈 찡그리고 한 번씩 쳐다보지 않을 수 없다. 태양이 있어 만물이 존재하는 것이건만 여름 태양은 원망의 대상이다. 태양계의 작은 일족인 지구 한 편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총알과 폭탄이 날아다니고 애먼 난민들은 죽지 않기 위해 죽음의 길로 몰려간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삶의 숙제들은 앞에 산적해 있는데 지구는 돈다. 그래서 다시 여름이다. 오직 시간만이 공평한 우리 세계에서 살아 있다는 이유로 한없이 지쳐가는 몸과 마음들에 어떤 위무의 손길이 있어 시원한 감로수 한 바가지 퍼부어 줄까.

여름이면 겨울이 그립고 겨울이면 여름이 그리워지는 무한반복의 간사한 세월 앞에서 모든 생은 어쩌면 무너지기 위해 살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너져가면서 무너진 자리에 홀로 세우는 희망이라는 깃발 하나, 그게 내일이 아닌 바로 오늘이었으면 좋겠다. 

여름을 건너야 가을이 온다. 그러니 죽지 말고 살아서 버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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