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행복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5.05.28 19: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수안 <수필가>

같은 읍내에 살던 작은 딸네와 살림을 합치고 한 달이 지났다. 

육아에 지친 딸이 함께 살자며 제안해왔는데 내가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손녀의 재롱을 마음껏 보는 행복한 할머니가 되리라.

세 살배기 손녀 서연이는 성격이 좋아 늘 방글거리며 웃었다. 그런 서연이가 할머니 보고 싶어 한다고 문자가 오면 한걸음에 달려가서 보고는 했다. 그러나 늘 올 때가 문제였다. 할머니 가지 말라고 울어대는 통에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다가 밤중까지 붙잡혀 있고는 했다. 

그러던 서연이가 변심했다. 이제는 할미에게 데면데면할 때가 있고 이유 없이 떼를 쓰기도 한다. 어린이집에 간 지 어언 석 달, 같이 살아온 시간은 겨우 한 달. 어린이집에 가면 선생님이 귀여워해 주는 것은 물론, 친구나 오빠, 언니가 많아 마음껏 놀다 온다. 집에 오면 어미 아비는 물론 전에 없던 할미와 이모까지 이뻐해 주니 사람 그리울 게 없을 터이다. 그렇다면 혹시 사랑이 너무 과했던 건 아닐까. 제 어미, 아비, 이모는 아직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는 시기라 그렇다며 교양 있게 대처하지만, 나는 따끔하게 훈육해서 나쁜 버릇이 몸에 배지 못하게 해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 생각을 어떻게 알았는지 서연이는 며칠 사이에 부쩍 할미에게 거리감을 두었다. 투정을 부리거나 막무가내로 떼를 쓰기도 했다. 살림을 합치면 손녀 재롱 보면서 마음껏 귀여워해 주려고 했더니 이건 상상하던 그림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제 어미 아비가 할미의 주장대로 육아방침을 바꿀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다가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은가. 무작정 다가가서는 의미가 없다. 내가 두 발 다가가면 서연이가 한 발 정도는 다가오도록 해야 했다. 

목욕 놀이 세트와 병원 놀이 세트 장난감을 사 와서 서연이에게 안겼다. 내가 두 발 다가간 것이다. 폴짝폴짝 뛰면서 환호하는 그 모습은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서연이도 한 발이 아니라 두 발은 다가온 느낌이었다. 더 주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참았다. 한꺼번에 많이 다가가면 뒤로 물러설지도 모를 일이었다. 

며칠 뒤에 제 이모의 조각천 서랍을 들고 거실로 나오며 서연이를 불렀다. 의아해하는 서연이에게 병원 놀이의 주인공 인형 똘똘이의 옷을 만들자며 천을 골라보라고 했다. 예상대로 서연이는 가지각색의 예쁜 천을 보자 마음이 두둥실 뜨는 것처럼 좋아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은 마음이 역력했다. 

드디어 서연이는 그 중에서 딱 하나만 골라야 하는 어려운 선택을 했다. 그 천으로 나는 바느질을 시작했다. 서연이 어미는 곁에서 정말 대단한 할머니라며 간간이 추임새를 넣었다. 나는 가끔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서연이는 경이로운 눈으로 할미를 바라보았다. 

또 며칠이 지나 이번에는 뜨개질을 했다. 깊은 푸른빛의 하늘색 실로 똘똘이의 모자를 짰다. 다시 며칠이 지나 같은 실로 상의를 짜서 입혀주었다. 똘똘이는 한층 더 우아한 인형이 되었다. 할미가 만들어 준 옷을 갈아입혀 가며 병원놀이를 하는 사이 서연이는 어느새 할미 바로 곁에까지 다가와 있다. 

예순 코앞의 나이에 세 살 손녀와 아옹다옹하는 것이 남의 눈에는 가당치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즈음 나는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아주 특별한 재미에 푹 빠져있다. 이것을 나는 행복이라고 말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