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꽃 지네. 꽃이 지네
바람에 꽃 지네. 꽃이 지네
  • 윤승범 <시인>
  • 승인 2015.05.26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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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윤승범 <시인>

가까운 지인의 부친이 세상을 뜨셨습니다. 어려서는 총명했고 젊어서는 서슬 퍼렇게 살던 분이었습니다. 뜻한 바대로 살기를 원했고 그렇게 되길 노력하며 살았던 삶입니다. 그러나 세월은 어쩌지 못해 품안에 안겼던 자식들이 커 갈 수록 본인은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육십이 넘자 질병이 찾아 왔고 칠십이 넘어 정신도 조금씩 혼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여생이란 그 끝을 알 수 없어서 남겨진 것이 많아도 채 다 비울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미련인 듯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예상은 했지만 예상치 않게 세상을 뜨셨습니다. 마련된 상청(喪廳)은 여느 집과 다를 게 없고 죽음을 마주한 가족들의 슬픔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삼우제까지 마치고 나니 팔십을 살았던 일생의 흔적이 없습니다. 

문득 오래전에 뵙던 구순(九旬) 할머니와의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그 할머니가 임종에 가까웠을 때 여쭈었습니다. 

‘할머니, 오래 사셨으니 아쉬운 것 없으시지요?’ 했더니

‘여지껏 살아 온 세월이 갈증 날 때 물 한 잔 들이키는 시간 정도 밖에는 되지 않은 것 같다’라는 철학적 비유의 답을 들려주셨습니다. 순간 지나간 세월이란 헛되고 부질없구나 싶었습니다. 

우리네 삶이 그렇게 뜨고 집니다. 꽃이 피기까지 길고 긴 세월이 필요하지만 피었다 싶은데 어느새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생애가 가을 바람에 지듯 가뭇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꽃은 내년에 다시 본다지만 사람은 다시 볼 수 없고, 필 수 없으니 지는 그 마음이 애잔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만 닥친 일이 아니고 누구나 겪는 일이고 겪어야 하는 일이고 또 내가 마주쳐야 할 일입니다. 

올 봄의 절기는 예전과 달라서 추운 겨울이 지나자마자 바로 초여름의 기온으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차차로 피어야 할 꽃들도 언제 피어날지 모르는 듯 피기도 하고 채 피지도 못하고 죽기도 합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입니다. 사는 동안에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하고 남은 여한이 없도록 살아야 할 것인데 어찌 그리 살기가 힘이 듭니다. 

한 연(緣)이 다른 연(緣)을 만나면 얽히고 설키는 것이 무수히 많습니다. 혼자 살기에 세상은 너무 외롭고 쓸쓸합니다. 그러나 더불어 살며 갖가지 연을 짓는 순간 우리는 잡사에 얽힙니다. 인간의 희노애락 애오욕과 근심과 걱정, 그리고 채 버리지 못한 연민들이 여기에 얽히고 저기에 설켜 눈물 짓게 하고 서럽게 합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싯구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헤어질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그렇겠지요. 만난 사람은 헤어지기 마련이고 떠난 사람은 다시 돌아올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헤어진 이별은 다시 만날 기약이 없으니 그 마음 애절하기만 합니다. ‘미워하지 말아라. 미운 사람 만나서 괴롭다’ 사랑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사람 못 보아 괴롭다‘라는 그 말처럼 살기를 바라지만 사람은 사람끼리 부대끼며 살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바람에 꽃잎이 흐드러집니다. 속절없는 봄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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