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쓰는 사회를 위하여
편지 쓰는 사회를 위하여
  • 김기원 <편집위원·청주대 겸임교수>
  • 승인 2015.05.25 18: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김기원 <편집위원·청주대 겸임교수>

백일장 글제가 ‘편지’였단다. 글제를 받아든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놀란 표정으로 달려와 ‘선생님 편지가 뭐예요’ 하더란다. 참으로 황당하지만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편지를 받아 본 적도, 써 본 적도 없으니 당연지사다. 

이처럼 편지가 박물관에 박제된 유물처럼 우리 삶에 유리되고 있는 것이다. 전화에 밀리고 이메일과 카톡에 밀리어 설 땅이 없어진 까닭이다. 그것도 출처불명의 비속어와 터무니없는 줄인 말이 난무하는 저급한 인스턴트 소통시대가 되었다.

대저 편지란 무엇인가? 

편지는 한자로 편할 便과 종이 紙이다. 종이에 안부, 소식, 용무 등을 적어 보내는 글이 편지인 것이다. 유의어로 글월, 서한, 서간 등이 있다.

편지는 쓰는 이와 받는 이가 있다. 받는 이에 따라서 안부편지, 연애편지, 위문편지, 논쟁편지 등 다양하다. 그러므로 모든 편지에는 쓰는 이의 마음과 정성이 깃들어져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이고 찢고 다시 쓴다.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 가슴속 울려주는 눈물 젖은 편지/ 하얀 종이위에 곱게 써내려간/ 너의 진실 알아내곤 난 그만 울어 버렸네/ 멍뚫린 내 가슴에 서러움이 물 흐르면/ 떠나버린 너에게/ 사랑노래 보낸다.’

1970년대를 풍미했던 어니언스가 부른 ‘편지’의 노랫말이다.

정말 그랬다. 

하얀 종이 위에 곱게 써내려갔고, 쓰다가 눈물까지 적시기도 했다. 그러므로 받는 이는 쓴 이의 진실을 온전히 느끼게 되고, 쓴 이는 받는 이로부터 받는 답장의 설렘과 기쁨이 있었다.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 간의 소통의 도구, 그게 바로 편지였다.

빨간 우체통과 예쁜 우표, 편지봉투와 편지지, 자전거를 탄 집배원 아저씨는 편지의 필수요건이었고, 편지를 전해주는 집배원은 반가움의 대상이었다. 집에서 밤새 편지를 쓰기도 했고, 때로는 우체국으로 달려가 엽서를 사서 그 자리에서 몇 자 적어 보내기도 했다. 

이따금 학창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은 빛바랜 편지를 꺼내 본다. 편지지 반쪽 정도의 짧은 글이지만 아버지의 자식사랑이 짙게 배인 글과 아버지 특유의 필체에서 생전의 아버님을 다시 본다. 그 편지가 내겐 국보이고 가보이다. 

이처럼 편지는 당시는 소통의 도구였지만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되고, 역사적 진실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편지를 쓰지 않는다. 

어른들이 쓰는 편지가 있다면 자녀들 결혼식 치르고 화객들에게 보내는 답례장이거나 부모님 장례 후 조문객들에게 보내는 감사장 정도이다. 그것도 본인이 직접 쓰지 않고 규격화되고 일반화된 기존 글본에 이름만 바꾸어 다량으로 찍어 보낸다. 축·조의금을 잘 받았다는 영수증으로 치부돼 읽혀지지 않고 곧바로 휴지통에 버려지니 이를 어찌 편지라 하랴.

편지의 종언은 통신기기와 매체의 발달에서 왔다. 전 국민 휴대전화 사용 시대니 언제든 전화할 수 있고 이메일과 카톡이 편지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교육과정에 편지쓰기 과정을 넣어 어린이들이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 올리는 편지를 쓰게 해야 한다. 적어도 ‘부모님 전 상서’, ‘할아버님께 올립니다’라는 편지를 써본 아이들은 문제아나 관심사병같은 사회부적응자가 되지 않는다. 편지는 곧 배려이고 사랑이고 감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편지 쓰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회다.

가정의 달 오월이 저물어간다. 남은기간 고마운 이, 그리운 이에게 한 통의 편지를 쓰자.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받아주세요’ 노랫말처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