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골 나들이
어느 시골 나들이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5.05.25 18: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곳에 갔을 때 도리어 마음이 푸근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도 궁벽한 시골 마을이라면 궁핍하고 불편할 것으로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 어쩌다가 그곳에 가게 되어 실제로 거기서 생활을 하다 보면 생각과는 달리 나름의 풍족함과 편리함이 숨어 있었음을 발견하고는 불안했던 마음이 곧 푸근해지는 것이리라. 송(宋)의 시인 육유(陸游)는 어느 봄날 우연히 산서(山西)성의 시골 마을을 걷고 있었다.

시골 나들이(遊山西村)

莫笑農家臘酒渾(막소농가랍주혼) : 농가의 섣달에 담근 술 흐리다고 비웃지 말라
豊年留客足鷄豚(풍년유객족계돈) : 농사도 풍년이어 손님을 붙들고 닭과 돼지도 풍족하네
山重水複疑無露(산중수복의무로) : 산 첩첩 물 첩첩 길마저 없는 듯하고
柳暗花明又一村(유암화명우일촌) : 버들 우거지고 꽃 만개하니 또 마을 하나
簫鼓迫隨春社近(소고박수춘사근) : 피리소리 북소리 다가오니 봄 제사 가깝고
衣冠簡朴古風存(의관간박고풍존) : 의관이 간소하고 소박하니 옛 풍속 남아있다
從今若許閑乘月(종금약허한승월) : 지금부터 한가한 달구경 허락하신다면
拄杖無時夜叩門(주장무시야고문) : 지팡이 짚고 무시로 찾아와 문을 두드리리라

시인은 우연히 농촌 마을에 묵게 되었다. 평소 시인의 생각으로는 궁벽한 마을에 술이며 안줏거리가 변변치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시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봄에 마시기 위해 지난 섣달에 담가 두었던 술(臘酒)이 비록 맑지 않고 흐리지만 맛있게 익었으니 절대로 술 가지고 비웃을 일이 아니다. 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오지나 다름없는 외딴 시골에 농사가 잘되어 먹을 것이 풍족해 나그네를 붙들기에 충분했고 뜻밖에도 닭이며 돼지 같은 안줏거리 또한 풍성했던 것이다.

술 한 잔 얻어 마시며 머물 만한 곳이라 판단한 시인은 처음의 불안감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주변을 돌아볼 만큼 홀가분하고 푸근한 마음이 되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 오지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산 넘어 또 산이고 물 건너 물이니 마치 사람이 왕래하는 길이 아예 없는 듯하였다. 그런데 이런 길 없는 길을 가다 보니 버드나무가 우거져 한편으론 어둡고 꽃이 만발하여 한편으론 환한 마을 하나가 또 나타났다.

이렇게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피리소리 북 리가 가깝게 들리었다. 봄 제사를 올리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제사를 올리는 사람들의 의관을 보니 간소하고 소박하니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시인은 외부와 왕래가 차단된 곳에서 옛 모습 그대로 소박하게 살아가는 도화원(桃花源) 같은 이상향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이 한가로이 달빛을 타고 노니는 것을 허락한다면 이제부터는 아무때라도 찾아와 문을 두드리겠노라고 후일을 기약하면서 시인은 마을을 떠났다.

사람에겐 누구나 선입견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어떤 사물의 실제 모습을 잘 볼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고는 선입견에 의해 닫히었던 마음이 열리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마냥 외지기만하고 궁핍해 단 하루도 묵기 어려울 것 같던 오지 마을에서 풍성함과 무욕(無慾)의 별천지를 발견했다면 이것은 보통 행운이 아닐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