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산
우암산
  • 박상일 <역사학박사·청주대박물관>
  • 승인 2015.05.2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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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박상일 <역사학박사·청주대박물관>

청주를 상징하는 산과 내는 우암산과 무심천이다. 우암산과 무심천은 청주라는 도시가 있게 한 자연의 배경이다.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은 무심천을 따라 청주에 와서 살기 시작하였고 무심천을 젖줄로 삼고 우암산을 울로 삼아 자연에 의지하면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일으켰다. 따라서 무심천과 우암산은 청주역사문화의 뿌리이며 청주사람의 삶과 문화의 터전이다.

청주의 진산(鎭山)인 우암산(해발 338m)은 청주시민이 가장 가까이하는 등산로이며 주말의 휴식공간과 학생들의 소풍장소로도 즐겨찾는 산이다. 우암산은 본래 와우산(臥牛山)이라 불렀던 산이다. 우리의 고유한 지명들이 일제강점기에 제멋대로 바뀌면서 와우산의 이름도 우암산으로 바뀌었다.

와우산의 명칭은 『여지도서』 등의 조선시대 지리지와 『청주연혁지』, 『조선환여승람』 등 일제강점 초기까지의 문헌기록에 나타나며 ‘우산(牛山)’이라 약칭되기도 하였다. 와우산이라는 산 이름은 산의 형상이 소(牛)가 누워 있는 모양에서 유래하였다는 속설이 일반적으로 구전되고 있는데 소를 불교와 관련하여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호사가들은 그럴싸하게 소의 형상을 설명하지만 필자는 40여 년을 우암산에 의지해 살면서도 아직 누워 있는 소의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제 와우산이라는 이름은 잊히고 요즘은 모두 우암산이라 부른다. 다른 명칭으로는 당이산(唐  山), 장암산(壯岩山), 대모산(大母山), 무암산(毋岩山) 등이 기록에 보이고 이밖에 목암산(牧岩山), 목은산(牧隱山) 등으로도 전해진다. 우암산이라 불리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와우산의 서쪽에 있는 우암동이 본래 청주군 북주내면 외덕리였다가 1935년에 청주읍에 편입되면서 우암동으로 개칭되었으므로 대략 이때부터 우암산으로 불리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우암산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으로 가까이는 상령산(上嶺山) 즉 상당산성의 남서쪽으로 뻗은 산줄기인데 상령산과의 중간지점 즉 우암산터널 부분에 속칭 ‘바람매기고개’라 불리는 낮은 안부를 사이에 두고 있어 독립된 산처럼 보인다. 따라서 청주의 외곽에서 시내 쪽을 바라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우암산이며 우암산에 올라보면 청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과연 청주의 진산임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삼국시대에 백제에 속하였던 청주는 상당현(上黨縣)이라는 지명으로 문헌기록에 처음 나타나는데 우암산은 상당현의 치소(治所)였다가 통일신라 때는 서원소경(西原小京),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태조 왕건이 축조한 청주나성이 이곳에 있었다. 지금도 정상에서 동서 두 갈래로 뻗은 능선을 감싸고 축조된 성곽의 흔적이 뚜렷하다. 지난해에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우암산성의 실체를 확인한 바 있는데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대대적인 발굴을 하더라도 앞으로 십년은 걸릴 것으로 생각된다. 우암산은 불교문화의 보고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팔만구암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렇게 사찰이 많았다는 의미이고 실제 목우사(牧牛寺) 터를 비롯하여 많은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문묘(향교)와 성황당이 이곳에 있어 청주목사가 제를 올렸다. 이렇듯 우암산은 청주역사의 요람이니만큼 반드시 학술조사를 계속해야 하고 식생과 자연환경을 살려 진정한 시민의 숲으로 거듭나야 한다.

옛날 청주의 대표적 경승을 표현한 서원팔경 중 하나가 ‘우산목적(牛山牧笛)’ 즉 와우산에서 들리는 목동의 피리 소리이다. 녹음이 우거진 우암산 숲에서 피리연주가 꼭 들어간 산중음악회를 열어보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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