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국가 ‘마한’에서 고대국가 ‘백제’로
초기국가 ‘마한’에서 고대국가 ‘백제’로
  • 김명철 <청주서경중학교 교감>
  • 승인 2015.05.13 18: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서경중학교 교감>

기원 전후부터 300년까지를 원삼국시대 또는 삼한시대, 초기국가시대라 부른다. 삼국사기에는 기원전에 이미 고구려·백제·신라가 세워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북쪽에는 만주의 집안지역을 중심으로 고구려가 초기국가에서 고대국가 단계로 성장하고 있었고, 남쪽에는 백제·신라·가야의 토대가 되는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이 발전하고 있던 시기이다.

고고 자료를 보면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하게 되는 시기는 서기 300년경에 이르러서라 하겠다. 이 시기에는 점점 청동기의 사용이 줄고 철기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어 무기는 물론이고 일상생활 도구로 널리 보급되고 사용된다.

높은 온도에서 구워진 회청색토기에는 실을 감은 듯한 도구를 토기의 표면에 굴려 무늬를 낸 끈 무늬와 문살 무늬에 시루를 비롯해 화분형 토기 등 다양한 모양의 토기들이 만들어졌다.

또한 무덤도 돌무지무덤, 널무덤, 덧널무덤, 독무덤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무덤이 널리 사용됐다. 이처럼 생활환경도 크게 개선되어 움집에 점차 온돌이나 부뚜막시설이 달리고 지상가옥을 짓기도 했는데 이런 변화를 바탕으로 집단간의 교역과 영역전쟁이 활발해지면서 사회구조와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해 각 집단은 점차 고대국가로 성장해 갔다.

금강의 상류인 미호천과 무심천을 중심으로 한 청주지역에도 새로이 철기 문화를 받아들인 토착세력이 마한의 한 정치세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강유역에 백제가 건국되면서 청주를 중심으로 한 금강유역의 이들 마한세력은 점차 백제의 중앙세력에 통합되어 갔다. 그리고 미호평야를 바라보며 농사를 짓고 터를 가꾼 마한사람들이 바로 청주 송절동과 봉명동, 송대리에 묻혀 있다. 이곳에는 길이 7m가 넘는 큰 무덤도 있는데 다른 무덤들이 이 무덤을 중심으로 주변에 있었다. 무덤의 크기와 배치 상태 등으로 보아 이 무덤의 주인공은 당시 송절동 마을의 우두머리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봉명동 무덤 떼는 청동기시대 마을이 있었던 구릉 일대를 포함해 넓게 분포하고 있다. 모두 240기의 널무덤과 덧널무덤이 조사됐는데 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5m이상 되는 대형 무덤도 발견됐다. 그리고 미호천이 내려다보이는 송대리에는 마한사람들의 흔적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현재 오창과학산업단지가 들어서 당시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는 70여 기가 넘는 무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덤 속의 관은 주목나무를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 나무는 높은 산에서 자라며 껍질이 붉은빛을 띠고 속살도 유달리 붉어 주목(朱木)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독감에 걸렸을 때 약재로 사용하기도 하며 잘 썩지 않아 살아서도 천년 죽어서도 천년을 간다고 한다. 이런 나무의 성질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죽어서도 그 영혼과 더불어 육신도 오랫동안 유지되길 소망해 관의 재료로 주목나무를 선택했던 것 같다.

미호천과 무심천 주변의 마한지역 무덤유적의 중요한 특징은 무덤 주위에 도랑을 두르거나 말 모양허리띠 고리가 무덤 안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특히 말 모양허리띠 고리 때문에 ‘마한’의 ‘마’자가 ‘말마(馬)’자인 이유와 깊은 연관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미호천과 무심천을 중심으로 ‘마한’을 이어 고대 국가 ‘백제’의 터전을 만든 것처럼 청주를 미래 한국의 가장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어 가야할 책임을 후손에게 남겨 주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