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보다 풀
사람보다 풀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5.05.11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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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흔히 5월을 일러 계절의 여왕이라 일컫는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한 마디에 오월에 대한 수많은 다른 찬사들이 묻혀버렸지만 일년 열두달 중 5월만큼 사람들로부터 진한 러브콜을 받는 달은 없을 것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온갖 꽃들의 화사함을 무색케 하는 연록의 향연은 싱싱한 생명 그 자체이고, 그 주인공이 바로 오월이기 때문이다. 싱싱한 생명의 발현인 오월의 풀은 세상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이 틀림없다. 당(唐)의 시인 맹호연(孟浩然)도 오월의 풀빛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유와 헤어지며(留別王侍御維)

寂寂竟何待,(적적경하대),쓸쓸하게 끝내 무엇을 기다렸던가?
朝朝空自歸.(조조공자귀).아침마다 공연히 스스로 돌아온다
欲尋芳草去,(욕심방초거),꽃다운 풀 찾아 떠나려하니 
惜與故人違.(석여고인위).친구와 헤어짐이 너무 아쉬워라
當路誰相假,(당노수상가),권세를 누가 빌려줄까
知音世所稀.(지음세소희).진정한 친구는 세상에 드물다네
只應守寂寞,(지응수적막),다만 응당 적막함을 지켜야 하리
還掩故園扉.(환엄고원비).고향집 돌아가 사립문 닫으리라.



화창한 봄날이건만 시인은 무척 외롭고 쓸쓸하다. 분명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누군가를 절실히 기다리고 있건만 그 사람은 끝내 오지 않는다. 그래서 외롭고 쓸쓸했던 것이다. 아침마다 나가서 기다렸건만 매번 빈손으로 돌아올 뿐이었으니 그 상심이 얼마나 컸겠는가? 

마침내 시인은 기다림을 끝내기로 결심한다. 쓸쓸함과 부질없음만을 가중시키는 기다림을 끝내고 은거할 곳을 찾아 떠나기로 한 것이다. 때는 마침 늦봄이거나 초여름이라서 그곳은 녹음(陰)이 짙어지기 시작했을 것이고 꽃보다 고운 풀이 연록의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당장에라도 그곳에 뛰어가고 싶지만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가까운 친구와 멀리 떨어져야 하는 것이 그것이다. 시인은 은거하던 곳을 떠나 한동안 도회지에서 지냈지만 그곳에서 느낀 것은 씁쓸한 세태이다. 권력을 쥔 자들은 그것을 어느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려 하지 않고, 친구일지라도 진심을 알아주는 일이 드문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본디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 없이 혼자 은거하는 방식을 고수하기로 하고 옛 시골집으로 돌아가 사립문마저 닫아놓고 살기로 한 것이다.

도회지에서 인사에 이리저리 얽혀 살다가 막상 그곳을 떠나고자 하면 아쉬움이 많이 남게 마련이다. 특히 오래 정들었던 벗과의 이별이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떠나고 나면 홀가분한 마음이 그 아쉬움을 잊게 하기도 한다. 은자(隱者)들은 비록 혼자 숨어 살지만 외롭지는 않다. 사시사철 변화무쌍한 자연이 그들의 벗이기 때문이다. 특히 늦봄이나 초여름에는 신록의 풀빛이 너무나 황홀하다. 세파에 찌든 사람은 물론이고 봄을 수놓은 꽃마저도 그 앞에서는 빛을 잃고 만다. 그러니 초여름 은자에게는 사람보다 꽃이요, 꽃보다 풀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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