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천
무심천
  • 박상일 <역사학박사, 청주대박물관>
  • 승인 2015.05.07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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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박상일 <역사학박사, 청주대박물관>

청주 무심천은 지금 하상도로의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1.3㎞ 구간의 수변공원 조성공사가 한창이다. 무심천은 청주라는 도시를 있게 한 지리적 배경이다. 우암산이 청주를 지켜온 진산(鎭山)이라면 무심천은 청주 역사의 탯줄이며 젖줄이며 혈관이다. 오늘도 말없이 무심하게 흘러 이름마저 무심천이지만, 그 물결 속에 청주의 어제와 오늘과 미래가 있다.

언제부터 무심천이라 불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청주사람들의 심성이 무심하여 무심천이라고 농담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고, 수심이 깊지 않아 무심천이라 하였다고도 하는데 뚜렷한 근거는 없다. 문헌기록에는 대교천(大橋川)이라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교천이 고을 남쪽 1리에 있으며, 근원은 적현(赤峴)에서 나와 오근진(吳根津)으로 흘러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여지도서’를 비롯한 조선후기의 모든 지리지에 이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고, ‘대동지지’에는 ‘대교천은 피반령 적현의 물이 서북쪽으로 흘러 주성(州城, 청주읍성)을 지나 서쪽으로 작천(鵲川, 까치내)으로 흘러간다’고 기록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조선환여승람’에도 ‘대교천은 군(청주군)의 남쪽에 있는데 근원은 문의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여기서 대교천이라 한 것은 ‘대교(大橋)가 있는 내’에서 유래되었을 것이고 대교는 곧 남석교(南石橋)를 말한다. 

그럼 언제 대교천이 무심천으로 바뀌었을까? 그리고 왜 하필 무심천이라 하였을까? 이에 대해 각종 설들이 있지만 모두 낭설일 뿐이다. 무심천이라는 명칭은 1750년대에 제작된 ‘해동지도’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 지도첩에 수록된 ‘청주목지도’를 보면 중심에 읍성이 그려져 있고 그 서편에 하천이 북류하다가 봉림수(鳳林藪)를 지나 서쪽으로 곡류하는 부분에 ‘무심천(無心川)’이라 표기된 것이 보인다. 이후 해동지도 계통의 ‘여지도’,‘지승’,‘비변사인 호서지도’, ‘팔도여지도’,‘광여도’ 등에는 일관되게 무심천으로 나온다. 이들 지도를 보면 무심천이라는 명칭이 모두 ‘봉림수’ 북쪽 지금의 ‘까치내’와 만나는 부분에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고지도를 분석해 보면 무심천이 처음에는 봉림수가 있었던 지금의 운천동과 신봉동을 지나는 하류부분만을 지칭하다가 점차 상류까지를 통칭하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즉, 18세기 초까지는‘대교천’이었다가 18세기 중엽부터 무심천이 하류지역의 명칭으로 등장하였고, 이후 발원지부터 미호천 합류지점까지 전체를 무심천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무심천 명칭이 일반화된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일제강점 초에 발행된 신문과 출판물에 무심천이 자주 나온다. 그래서 무심천이 일제가 만든 명칭으로 오해되기도 하였지만, 무심천은 늦어도 18세기부터 사용된 명칭임에 틀림없다.

무심천의 지명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무심하게 말없이 흐르는 내’라는 설, ‘무심하고 무정한 내’라는 설, ‘물이 없는 내’라는 의미의 무수천(無水川)이 변한 것이라는 설, ‘수심이 없는 내’라는 의미의 무심천(無深川)이 변한 것이라는 설,‘무성뚝(武城-) 안으로 흐르는 심천(沁川)’이라는 의미의 무심천(武沁川)에서 변한 것이라는 설, 불교용어‘무심(無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 아주 다양하다. 그러나 모두가 고증되지 않은 추측일 뿐이다. 

오늘도 무심한 듯 흐르지만 무심천은 영원불변할 청주의 상징이다. 무심천은 확실히 예전보다 환경이 좋아져서 백로도 심심찮게 보이고 수달도 산다고 하고 낚시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수변공원과 생태환경 복원을 통해 멱감고 물장구치던 추억의 무심천으로 되살아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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