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다
길을 잃다
  •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 승인 2015.05.07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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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깜깜한 새벽이었다.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서 또랑또랑한 눈망울이 천진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까만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다. 언덕을 내려오는데 좀 전까지는 없었던 고라니가 어딘가에서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그 천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며 브레이크 페달을 있는 힘껏 밟았다. 뒷좌석의 물건들이 우장창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보닛(bonnet·본네트)에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아~ 어쩌면 좋을까!’ 순간 나는 눈을 꼭 감았다. 암담했다. 그리고 난 잠시 절망 속을 헤맸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눈을 떴다. 그런데 고라니가 뛰기 시작했다. 차 앞으로 난 도로를 겅중겅중 달리고 있었다. 나는 안도감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라니에게 시선을 던졌다. 다행히 아무 이상이 없어 보였다. 멀어져 가는 고라니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차를 갓길로 댔다. 너무 놀라서 어둠속에서 나는 사시나무가 되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25분이다. 도로위에는 아무 것도 미동하지 않았고 난 까만 밤의 도로 위에서 잠시 생각을 비웠다. 시동을 끄고 자동차 핸들에 머리를 묻었다. 그 눈빛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 맑은 동공, 그 맑은 눈빛, 그 맑은 시선, 그 맑은 영혼의 소리 없는 울림.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 어둠만큼이나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잠시 눈을 붙였다. 한시간여 잤을까. 악몽에 시달렸다. 벌떡 일어나 머리맡에 놓여있는 물을 마셨다. 꿈을 더듬으며 생각에 잠긴다. 꿈속에선 온천지가 하얀 눈이었다. 나는 홀로 길을 잃고 눈발 속을 헤매고 있었다. 천지를 분간할 수 없게 눈이 내리고 길은 눈에 덮여 길인지 들판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 절망 속에 서성이고 있는데 저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눈발 속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보며 난 깊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언니였다. 언니가 차를 갖고 나를 마중 나왔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언니를 붙잡고 그만 울어버렸다. 

꿈을 곰씹었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그대로 씻고 이른 출근을 했다. 일을 하는 동안 하루 종일 고라니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무사하겠지? 뛰어갔으니 뼈에는 이상이 없는 거겠지? 어쩌다 길을 잃어 홀로 도로를 서성인 것일까?’

문득 그 어둠 속의 고라니가 나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도 인생을 살면서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아니, 지금도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인가? 나도 인생의 길을 잃어 서성이는 것은 아닐까?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진정 나의 길인가? 그 밤의 어두운 도로에서 갈길 몰라 서성이던 고라니처럼 지금도 나는 내 인생의 길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길을 걸은 적이 있었는가? 이 길은 지금 맞는 길인가?

고라니가 길을 찾았기를 바란다. 내가 꿈속에서 언니를 만난 것처럼 가족을 만났으며 좋겠다. 그래서 아픈 몸을, 어둠속을 헤매며 먹먹했을 가슴을 풀어놓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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