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혁명의 아버지 손문(孫文), 그리고 중산릉(中山陵)
<6> 혁명의 아버지 손문(孫文), 그리고 중산릉(中山陵)
  • 엄갑도 <전 충북중앙도서관 관장>
  • 승인 2015.05.0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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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중국 장강(長江) 문화의 향기를 찾아

엄갑도 <전 충북중앙도서관 관장>

총통부 관람을 끝낸 우리는 남경박물관으로 가서 시대별로 공간을 따로 해서 잘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을 바쁘게 살펴보고 바로 중산릉(中山陵)으로 향했다. 

중산릉은 중국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중국의 정치가이자 혁명가인 손문(孫文·1866~1925·호 중산)선생의 묘가 안치된 릉으로 남경에서 가장 즐겨 찾는 관광지중의 하나다. 우리는 환중산 입구 매표소에서 미니 전동차를 타고 중산릉 입구에 도착했다.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 릉(陵)은 1926년부터 1929년까지 약 3년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넓이가 6.6㎣, 길이가 7㎣로 총면적이 20여 ㎢에 이른다. 1925년 3월 12일 북경에서 향년 59세의 나이로 서거할 때, “남경은 임시정부 수립의 땅임으로, 남경에 묻힐 수 있다면 신해혁명의 정신을 잊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했던 유언에 따라 중산릉을 축조하고, 1929년 유해(遺骸)를 북경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손문의 유언은 아주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라고 하였다는데, 손문을 존경하는 중국은 여느 황제의 능보다 더 화려하게, 이렇게 엄청난 능을 조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 광장 끝에 ‘박애’(博愛)라고 쓰인 박애문이 있었고, 그 문 밑을 지나 엄숙한 느낌을 자아내는 아름드리 전나무 숲길을 걸어가니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현판이 붙은 능문(陵門)이 나타났다. 이 능문은 3개의 아치형 문이 있고, 지붕은 푸른색 기와로 덮혀 있었다. 능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것이 역시 푸른 기와를 올린 비각(碑閣)이었다. 그 석조 건물 안에 큰 비석이 서 있었다. 비석에는 ‘중화민국 18년 6월 1일 중국 국민당은 총리 손(孫)선생을 이곳에 장례 지내다.’라고 황금색으로 쓴 비문이 있었다. 1911년 신해(辛亥)혁명에 성공한 손문은 1912년1월1일 삼민주의(三民主義·민족 민생 민권)를 지도 이념으로 하는 공화정 중화민국을 세우고 임시 대총통에 올랐으나 얼마 뒤 원세계(袁世凱)에게 자리를 내주고 총리로 밀렸기 때문에 총리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비각을 지나니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오르막 계단 이 펼쳐져 있었다. 계단의 수는 392개였다. 중산릉 조성 당시 중국의 인구가 3억9200만명이었기에 이를 상징한다고 한다. 숨차게 계단을 걸어올라 제당(祭堂)에 오르니 3개의 타원형 문이 있고, 각 문의 위쪽에는 각각 ‘民族’,‘民權’, ‘民生’이라는 손문의 삼민주의 이념이 새겨져 있었다. 

건물 안엔 백옥으로 만든 손문의 좌상이 모셔져 있었고, 그의 시신은 그 뒤 묘실(墓室)안에 안장돼 있다고 한다. 제당 벽면에는 흑색 대리석 바탕에 손문의 유작인 ‘건국대강’본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 중산능을 보면서 중국의 봉건 전제 통치를 종식시킨 건국의 이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중산릉의 제당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멀리보이는 남경의 도심과 울창한 숲으로 형성된 수려한 풍광이 가히 명당이었다. 

중산릉 관람을 끝내고 내려오는 길에 가까이 있는 영곡사( 514년 창건한 개선사를 명대인 1381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온 고찰)도 둘러보았다. 영곡사에는 높이 60m의 9층탑인 영곡탑이 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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