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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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 승인 2015.04.30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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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계절이 또 한 번 몸을 풀고 있다. 땅속에 품었던 봄을 밀어올리며 죽은 듯이 누워있던 계절이 꿈틀대고 있다. 마당으로 나섰다. 잔디에 싹이 푸르게 올라오고 있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비발디의 사계가 처마밑에 쨍그랑거리는 풍경에 닿아 부서진다. 햇살이 등을 토닥여 주고 난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호스를 들었다. 호스에서 퍼져나가는 물줄기가 연산홍 봉오리 속으로 스민다. 산을 본다. 진달래가 여기저기 연분홍색으로 번지고 있다.

그해 봄, 연분홍빛으로 피어나던 그녀가 스친다. 진달래꽃을 보며 함께 산책했던 우암산 길.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세월에 덮여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포근했던 봄날의 정취는 아직도 생생하다. 키가 컸던 그녀, 그리고 유난히 말이 없던 그녀, 내게 명자꽃을 처음으로 알려준 그녀, 자신의 이름이 명자라며 웃던 그녀! 그녀의 집은 문경의 어느 시골 마을이었다. 이런저런 사연 속에 그녀는 청주로 대학을 진학하게 되었고 나와는 대학 4년 동안 늘 붙어다녔었다. 방학이면 그녀는 나를 문경 그녀의 집으로 데려가곤 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몇날 며칠을 먹고 자고 어정버정 서성이며 느긋하게 청춘을 발효시켰었다. 

청춘의 봄날, 우암산 자락을 산책하다 갑자기 그녀가 진달래꽃을 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취방에서 내게 진달래 화전을 부쳐주었다. 말로만 듣던 꽃 부침이었다. 난 그 예쁜 것들을 차마 한 입에 먹지 못하고 눈으로 한 번 먹고 입으로 또 한 번 먹었다. 맛도 맛이지만 꽃을 먹는다는 그 묘한 느낌이 좋았다. 그 후 봄이 되면 진달래와 명자가 떠올랐다. 꽃을 보면 봄바람이 난다하여 집 안에는 심지 않았다는 명자나무! 오늘은 그녀를 추억하며 나무를 심고 싶었다.

장에 갔다. 명자나무가 빨간 꽃을 터뜨리며 웃고 있다. 한 그루를 샀다. 빨간 꽃이 필 때면 꽃말처럼 겸손했던 명자를 떠올리리라. 그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라일락도 한 그루 샀다. 보랏빛 꽃잎을 보며 젊은 날의 추억을 회상하리라. 목련도 한그루 샀다. 하얀 꽃잎을 보며 이룰 수 없었던 사랑도 돌아보리라. 언덕에 심을 장미도 샀다. 장미 향기를 맡으며 향기롭던 그녀와의 시간도 피어나리라.

돌아오는 길, 산자락을 물들인 진달래가 손짓한다. 환하게 피어 있는 꽃을 따서 봉지에 담았다. 집으로 오자마자 물을 끓였다. 뜨거운 물로 찹쌀가루를 익반죽했다. 반죽을 동그랗게 빚어 그 위에 꽃을 살포시 놓고 진달래 화전을 만들었다. 땅위로 막 고개 내민 쑥을 캐서 쑥버무리도 만들고, 남은 쑥으로는 차를 끓여 그 위에 진달래 꽃잎을 동동 띄웠다. 봄 향기 가득한 거실에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햇살을 받으며 봄을 먹는다. 

봄 향기를 입 안 가득 머금고 마당으로 나갔다. 담장에 장미를 심고 목련은 감나무 옆에 심었다. 라일락은 뒤꼍에 심었다. 명자나무는 그 빨간 꽃을 언제고 볼 수 있도록 거실 창 앞 언덕에 심었다. 해마다 명자 꽃을 볼 때면 나는 그 청춘의 행복했던 시간들과 화전을 만들어 주던 키 큰 명자를 떠올릴 것이다. 오늘따라 지나버린 시절의 그녀가 봄 햇살처럼 따사롭게 가슴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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