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교육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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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1.03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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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청의 교육학
오 희 진 <환경과 생명 지키는 교사모임 회장>

마지막 가는 가을을 눈에 담으려 들로 나선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는 볏짚까지 축산 사료로 이용하기 위해 깡그리 모아 단단히 둥글려 꽁꽁 쟁여져 하얀 비닐 포장에 싸여 있다. 마지막까지 땅을 쥐어짜는 노력이야 가상하지만, 사람 말고 겨울을 나야하는 새들은 어디서 먹을 것을 구할까 볏짚이 사라진 논바닥은 청소한 바닥처럼 깨끗하다. 자연은 사라지고 사람의 기술과 욕망만이 가을 들판을 휘젓고 갔다. 그 중에 자연이 남긴 것은 씨앗의 껍질, 그 잔해뿐이다. 콩깍지가 비틀어진 콩대가 그렇고, 참깨가 그렇고, 밤 까시 껍질이 그렇다. 걸어보라. 어쩌면 나머지 사람에게도 목숨 줄이 걸린 새와 마찬가지일테니.

더 걸어가는데 앞쪽 밭에 백여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하고 있다. 푸른 귀리 밭을 헤치고 그리로 건너간다. 사료용으로 재배하는 것이란다. 사람들이 가득 모여선 밭은 단무지 무를 재배한 밭이다. 하얀 종아리보다 큰 무들이 밭에서 뽑혀져 고랑마다 더미를 이루고 있다. 그것들을 커다란 포대에 담아 놓아야 한다고 외치는 할머니가 아마 주인일 것이다.

사람들은 무를 뽑아 무청을 떼어 내고 포대에 그것을 모으는 대가로 싱싱한 무청을 맘껏 가져갈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는 모양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무청을 담아 밖으로 가고 있고, 이제 밭으로 들어오는 이도 있다. 일손을 구하기 힘드니 밭주인에게는 쉬운 수확의 방식일 것이다. 그래도 일머리를 모르는 이들이 걱정이 되어 연신 뭐라 소리를 지른다. 그 중에 양심이라는 말에 제일 힘이 들어간다. 백여 명이 넘는 이들 중에 무를 뽑아 놓고 무청만을 챙겨 담아가는 이들이 있어서 그러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참을 보고 있으니 모두들 무를 열심히 포대에 담고 있다. 가을 햇볕이 밭에 따사롭게 쬐는 만큼 사람들은 밭주인을 위해 열심히 무를 모으고 있다. 품앗이. 일손이 부족할 때 서로 돕는 좋은 일의 관계맺음. 지금 이 밭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어쩌면 그보다 더 가치 있는 행위의 자연적 발현일 수 있다.

주인에게 무청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는 오직 무를 다치지 않게 뽑아 모으고 그것을 단무지공장에 넘기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경제학이다. 그렇기에 무를 뽑아주는 자연발생적 사람의 무리에게 양심 운운 염려를 내뱉는 것은 어쩌면 잘 짜여진 음모의 과정이다. 밭 주변을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무를 뽑는 일은 흥미를 일으키는 광경이다. 거기다 겨우내 먹을 수 있는 시래기를 만들 수 있는 무청을 거저 얻을 수 있으니 더욱 좋지 않은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누구나 할 수 있지 않은가 목적지가 있는 이에게도 잠시 자연과 농사일에 시간을 내어줄 정도의 가을볕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냥 가을을 느끼러 나온 도시민에게는 참가비를 내어도 좋은 쉬운 일이다. 거기 얼마만큼의 무청 욕심이 지나칠 것인가 그런 이라면 그는 주인의 경제학만큼이나 아쉬운 처지일 것이다. 주인의 도덕은 그래서 노예의 도덕이 되고 만다. 그는 오히려 자신을 도와주러 온 그들에게 무라도 두어 개 가슴에 안겨 보내야 그 관계맺음이 평등해짐을 깨우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 또한 그렇다. 내게 학생들과의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은 가령 이런 것이다. '보잘것없는 삶의 외로움과 동경을 되찾고 서로를 위로해주려는 것. 타자를 죽이고 자기가 살아남는 '자기파괴'를 요청하는 생산양식, 정체성, 권력향유 등과 같이 존재를 망각시키는 온갖 힘들을 벗어나는 것. 그러한 힘들이 불가능하도록, 그러한 힘들이 작용할 수 없도록 제도화하는 것.'(이종영) 그런데 조금 앞으로 나아가기는 한 것인가 어느덧 황혼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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