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떠나는 그 자리에서
봄, 떠나는 그 자리에서
  • 정상옥 <수필가>
  • 승인 2015.04.28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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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상옥 <수필가>

봄이 다녀간 길을 따라 걸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꽃 비가 머리 위로 살포시 내린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만나는 사람마다 첫인사를 여기저기 꽃소식으로 전하며 한껏 들떠 있던 그 자리엔 상춘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이제 보이지 않고 일상에 바쁜 종종걸음들 뿐이다. 

꽃잎을 떨구어낸 나뭇가지 끝이 한 줄기 바람에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꽃 진 자리마다 연둣빛 새 잎사귀들이 약동하듯 비집고 나오고 있으나 화려했던 봄날의 만개한 꽃의 향연에 비길 수야 있으랴. 한 계절이 떠나가는 길목이 공허처럼 더 크게 휑하니 보인다.

올해도 여지없이 나의 봄 앓이는 비켜가질 않는다. 

해마다 맞이하고 보내는 계절이건만 매번 처음인 양 만개한 꽃을 볼 때 마음이 화창해지다가도 하나, 둘 속절없이 지는 꽃들을 바라보면 또 우울해지고 서글퍼지는 건 어인 일인지. 반세기를 넘긴 연륜이지만 심성만은 늘 봄에 머물고 떠나가는 것들 앞에서 담담해지지 못하는 건 세파의 물결에도 아직 여물지 않은 탓일까.

시나브로 가는 봄을 좇아 바람처럼 훌쩍 떠나고 싶은 방랑객의 심경이다. 

몇 발자국을 터벅터벅 걸었다. 발밑으로 한 무더기의 연초록 새싹이 푸석한 흙더미를 밀고 힘겹게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힘겨운 생명의 약동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찡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거친 황무지에서도 홀로 싹을 틔우며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는 그 모습이 가히 숭고하다.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보드라운 새싹 더미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모진 겨울을 견디어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냐고, 홀로 견디며 봄을 찾아오는 동안 외롭지 않았느냐고 묻진 않았지만, 손안의 체온이라도 전해 주고 싶은 내 간절함이었다. 

진정한 삶이란 살면서 생기는 시련에 쉽게 무릎 꿇지 않는 것이라 했다.

지나온 내 삶의 계절들을 떠올려본다. 소슬바람 같은 작은 난관 앞에 설 때마다 얼마나 두려워하며 소극적인 모습으로 떨곤 했던가. 겨울의 풍파에 마주 서며 단단해지기보다는 온실 안으로 피해가려고 만했고 포기하는 쪽을 더 쉽게 선택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결코 적지 않은 숫자로 봄을 맞이하고 보내면서도 매번 봄바람의 작은 흔들림에 시끄러운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산다.

세상의 풍경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와 있을 때이리라.

얼마 남지 않은 사월의 햇살은 새로운 계절을 위해 이토록 따스하게 내리고 있으니 이제 떠날 것은 떠나보내고 시끄럽던 내 마음의 소요도 다독여 평정심을 찾아야 할 때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의 봄 풍경은 내일보다 더 젊은 날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두고 다시 올 아름다운 내 삶의 봄을 기다리면서.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자기를 구속하는 일이라 했지만 떠나간 봄의 자리에 서서 여백 없이 촘촘하던 마음에 기다림이란 쉼표 하나를 또 던진다.

사월은 결코 잔인한 달이 아니었다. 이별이 있어야 그리움이 있듯이 화려했던 봄의 향연은 추억이 되고 내일을 희망하는 기다림이 되리니….

햇살 고운 사월이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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