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천 들녘에 부는 바람(2)
미호천 들녘에 부는 바람(2)
  •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5.04.26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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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정북동 토성도 문이 엇갈려 있어서 적이 성문 가까이 왔을 때, 자기 몸을 숨기면서 좌우에서 공격하기 쉽도록 만들었다. 치성은 밖으로 불룩하게 튀어나오게 쌓아 성에 다가온 적을 공격하기 쉽게 만든 시설이다. 또 성벽에 잇대어 1~2겹, 3~4겹으로 바닥에 깔아놓은 냇돌 무더기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어른 주먹 크기만 한 돌에서부터 더 큰 돌까지 다양한 냇돌은, 전쟁 때 적을 향해 던지기 위해 준비해 둔 것으로 보인다.

정북동 토성은 성을 쌓은 기술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단순하게 흙을 퍼 올려 쌓은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 발달된 기술을 바탕으로 구조적으로 튼튼하게 쌓았다. 판축기법(板築技法)을 써서 지었는데, 판축이란 가운데에 기둥을 세우고 바깥쪽에는 널빤지를 대고 진흙과 모래를 넣고 두드려 여러 차례 다지는 고대의 토목공법이다. 

켜켜이 마치 시루떡처럼 쌓아올렸다. 오랜 역사를 안고 있는 성벽 길은 그래서인지 더 단단해 보인다. 아마도 흙의 성질을 알고 성을 쌓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비바람과 풍화에도 천오백 년 이상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렇게 쌓은 성이다 보니 이 성을 누가 언제 처음 만들었는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영조 20년 (1744년)에 승장 영휴가 쓴 <상당산성 고금사적기>에 토성 관련 기록이 있다.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이 토성을 축성하여 곡식을 저장하였다가 상당산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출토 유물과 축성방식 그리고 주변 여건으로 보아, 약 2세기경인 원삼국시대 최초의 축성이 이루어진 것으로도 보고 있다. 또 궁예가 상당산성을 쌓아 도읍을 삼았는데, 견훤이 산성을 빼앗아 정북동 토성으로 짐작되는 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후삼국 쟁란기인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보기도 한다. 이때의 정북동 토성은 전쟁의 방어시설 기능은 약해지고, 평야지대에서 거둔 곡식을 산성으로 옮길 때까지 보관하고 지키던 시설로 쓰여진 것이 아닐까 싶다.

정북동 토성은 현재 사적 4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진 토성은 서울에 있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다. 이들도 강변의 구릉지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정북동 토성과 비슷한 시기인 삼한시대와 백제 초기에 쌓여진 것이다. 정북동 토성은 이들 토성보다 훨씬 발달된 형태를 이루고 있고 보존도 잘 되어 있다. 그래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고 초기 토성 축조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미호천 들녘에 부는 바람이 훈훈하다. 평야지대에 쌓은 성이라서일까. 흙으로 쌓았다는 느낌 때문일까. 돌로 쌓은 성보다는 왠지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마저 감돈다. 우리나라 초기 토성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정북동 토성은 사적을 공원화하기 위한 공사가 지금 한창이다.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아올린 흙 위로 살포시 내려앉은 지난 시간들. 축적된 과거의 흔적들이 역사가 되고 밑그림이 되어 마침내 현재가 되고 미래가 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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