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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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15.04.23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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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비가 한 번 내릴 때마다 대지는 고운 빛깔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심란한 마음에 불을 지른다. 꽃피는 봄은 물색없이 화려하다.

나는 이 좋은 봄날에 60년을 터줏대감으로 살아온 동네를 떠나려니 아쉬움이 많다. 한때는 이 동네, 이 집을 떠나지 못해 안달했던 시간도 있었다. 오래전부터 세웠던 계획을 실천하려는 것이다. 이제는 상가주택을 관리하는 것도 힘에 부친다. 몸집을 줄여 가든하게 살 때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심란하고 서운하다.

나는 많은 세입자와 살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귀한 세입자가 있다. 우리의 허락도 없이 어느 날 옥상에 방을 들여 지금까지 살고 있지만 고맙기 그지없다. 그들은 일가친척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침입자였다. 나는 그들에게 한 번도 세를 받아 본 적이 없다. 내가 부자라서도 착해서도 아니다. 그런데 20년을 함께 살았다. 풍수 지리적으로 좋은 터에만 자리를 잡는다는 까치와 살았다. 처음엔 옥상을 어질러놓아 쫓아내려 했다. 하지만, 까치들과 함께 산 시간이 고맙다. 요즈음 까치들은 내 심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을 낳아 식구를 늘리기 위해 분주히 집수리를 한다.

이 집에 살면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좋았던 일도 많았고 인생의 쓰디쓴 맛도 알았으며 많은 사람과도 만났다. 내 인생의 가장 뜨거웠던 20년을 여기서 보냈다. 시할머니 모시고 4대가 함께 살았고, 할머니 돌아가시고 부모님과 살다가 부모님 두 분 돌아가시고 이제는 부부만 남아있다. 남편은 여기서 나고 자랐다. 남편의 지난날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곳이다. 어찌 쉽게 떠날 수 있으랴. 난 여기서 내 뼈도 묻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인생은 어떤 운명에 끌려가는가 보다. 이제는 우리마저 이 집을 떠나야 한다.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었다.

나는 세입자로의 삶도 있었고 주인세대로도 오랜 시간 살았다. 내 나이 쉰아홉, 이 나이쯤 되는 사람이라면 결혼해서 처음에 몇 년은 전, 월세로 시작하다가 집을 장만하였을 것이다. 세를 살다가 내 집을 장만하였을 때의 기쁨을 어찌 말하랴.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살고 있는 세입자들이다. 그런데 마치 영원히 자기 땅, 자기 집이 될 것인 냥 죽는 순간까지 욕심을 부리며 산다. 그 욕심을 채우려고 안간힘을 쓴다. 순간순간 느끼는 기쁨과 작은 행복을 놓치고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거부하며 사는 날이 많다. 생각해보면 나도 그랬다.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니 사람들이 무서웠다. 그래서 마음을 다 열지 못하고 살았다.

우리는 이 나라의 주인이면서 세입자다. 잘 가꿔야 한다. 내 자식들이 살 집이다. 나이가 들면서 깨끗하게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육신만 떠나고 흔적 없이 조용히 가는 것이다. 나는 늘 작고 소박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을 정리하면서 내 인생도 정리를 해 본다. 오늘은 다 접어놓고 지금까지 잘 살아온 우리 동네를 천천히 돌아봐야겠다.

물색없이 화려한 이 봄, 이 아름다운 청주에 살고 있는 것이 새삼 고맙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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