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지킨 박춘무와 그 가족들
고향을 지킨 박춘무와 그 가족들
  • 박상일 <역사학박사·청주대 박물관>
  • 승인 2015.04.23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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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4월은 잔인한 달이라 했던가. 온통 나라가 어수선하다. 역사적으로도 4월에 일어난 사건들이 유난히 많은데, 결코 잊을 수 없는 국난이 있다. 1592년 4월 13일에 15만의 왜군이 부산으로 쳐들어왔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이다. 왜군은 부산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2주 만에 한양에 입성하였고, 선조 임금은 개성에서 다시 평양, 의주로 몽진(蒙塵)을 하였다. 몽진은 머리에 먼지를 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 임금이 저럴진대 청주라고 온전할 리가 없었다. 관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연전연패하여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을 때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의병들의 항전이었다. 청주에서는 박우현(朴友賢)이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우다 전사하였고, 이어 조헌 영규 박춘무가 이끄는 의병이 합세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으니 이는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승리로 기록되고 있다.

청주 복대동과 강서동에 세거하는 순천 박씨는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울 때 목숨 바쳐 외적을 물리친 충신가문으로 유명하다. 박춘무(朴春茂)는 호가 화천당(花遷堂)으로 토정 이지함에게 수학하여 찰방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고 죽음으로써 청주를 탈환할 것을 맹세하였다. 당시 관찰사 윤선각이 돕지는 못할망정 공을 탐낸 나머지 의병의 처자를 못살게 구는 등 은근히 의병활동을 방해하였으나 박춘무는 굴하지 않고 의병을 모았다. 그리고 조헌 영규와 힘을 합하여 8월 1일 청주성을 공략하였는데 박춘무는 남문을 맡고 조헌은 서문을 맡아 공격하였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이날 밤 의병군은 야습을 감행하여 성으로 기어 올라가 적을 공격하니 왜적들은 의병군의 위세에 놀라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청주성 탈환 후 박춘무는 진천으로 가서 왜군을 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는데, 그의 아들 동명과 아우 춘번도 선봉으로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박춘무는 평소 그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전진(戰陣)에서 용기가 없는 것은 효가 아니다’라고 훈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시호는 민양(愍襄)이고, 민충사에 배향되었으며, 중앙공원에 그의 전공을 새긴 전장기적비가 있다.

박동명(朴東命)은 호가 매은당(梅隱堂)으로 청주 강서에서 출생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아버지를 따라 의병의 선봉에 서서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우고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태안군수와 제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괄의 난 때는 병으로 직접 출전하지 못하게 되자 아들 홍원으로 하여금 대신 의병을 이끌고 참전케 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6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몸소 의병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왕을 호종하였으며, 청나라 군사의 공격을 받아 분전하다가 광주의 무계에서 전사하였다. 이에 선무원종공신에 이름을 올렸으며, 1709년에 그의 충용을 가상히 여겨 고향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공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며, 강서동에 충신각이 있다.

박춘번(朴春蕃)은 형 박춘무와 함께 토정 이지함에게 수학하였고, 임진왜란 때 박춘무가 이끄는 의병군에 참여하여 부부장으로서 청주성을 탈환하고 진천 방면으로 진격하여 왜적을 토벌하는 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난 이후에는 기근에 굶주려 쓰러지는 사람을 위하여 집 뒤에 죽을 쑤어 놓고 인근 사람을 살려내었으므로 세칭 덕옹(德翁)이라고 했다. 후에 자헌대부 호조판서에 증직되었다. 1728년 청주에서 일어난 이인좌의 난도 양력 4월이었고 상당산성에서 반군을 궤멸시킨 이는 창의사 박민웅(朴敏雄)이니 박춘번의 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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