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남경대학살, 그리고 역사가 주는 교훈
<4> 남경대학살, 그리고 역사가 주는 교훈
  • 엄갑도 <전 충북중앙도서관장>
  • 승인 2015.04.21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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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중국 장강(長江) 문화의 향기를 찾아

엄갑도 <전 충북중앙도서관장>

남경대학살! 끔찍한 이 사건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전후의 중(中) 일(日) 관계, 그리고 역사가 주는 교훈은 어떠한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937년 12월 13일, 당시 국민정부의 수도였던 남경 성에 입성한 일본군은 군인포로들이나 민간인들(노인, 부녀자, 어린이) 가릴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학살을 하였다고 한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이나 되는 단위로,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 목 베기 시합 희생물, 혹은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에 의해 산 채로 파묻혀서 생매장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일본군은 여자들에게도 눈을 돌렸다고 한다. 이른바, ‘집단윤간’, ‘선간후살’(先姦後殺)로 먼저 강간 후 참혹하게 살해했다고 한다. 그 대상은 10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어린이부터 60, 70대 노파까지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수녀와 비구니들 까지 보이는 대로 능욕했다고 하니 그 참혹하고 잔인함이 극악무도(極惡無道)에 달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30만 명 이상의 남경시민들이 6주간에 걸쳐 참혹하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지금 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집단 학살 유적지가 20여 곳이 넘고, 주로 장강(長江) 변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남경이 전례에 없는 큰 재난을 당한 사건이 남경대학살 사건인 것이었다.

그 후 중국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항하여 격렬하게 항전해오다 미국의 일본 본토 원자탄 투하로 1945년 8월 15일 일본 히로히토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9월 2일 일본 도쿄만의 미국군함 미주리호에서 일본의 투항식이 진행되고, 남경에서는 9월 9일 일본 침략군 중국 전투지역 투항 조인식을 가졌는데, 일본 중국파견군 총사령관 오까무라가 투항서에 싸인 했다. 이로써 중일전쟁은 중국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전후 처리에 있어 1946년 1월 19일 중국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1개국이 일본 도쿄에 원동국제군사법정을 설치하여 28명의 갑급 전범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남경대학살 주범인 마쯔이완이 교수형 판결을 받았고, 1946년 2월 15일 남경에 중국전범재판군사법정을 설치하여 남경대학살에 대해 집중적으로 진행하여 일본군 제6사단장 다니하이소 등 주모자격인 군 수뇌부 일부를 처형하여 살인자들의 죄 값을 치르게 했다. 

1985년 기념관이 건립된 후 식견 있는 많은 일본인들이 반성하기 시작했다. 1986년부터 일본 ‘식수방문단’이 찾아와 ‘푸른 속죄’를 하고, 또 일본 명심회 등 일본 각지의 방문단들이 찾아와 전쟁에 대한 반성과 참사자에 대한 추모를 하면서 다시는 이런 역사의 비극을 만들지 않을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다수 세력들은 대학살은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숫자를 부풀린 사기극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또 일본이 교과서를 개정하는 과정에서 남경대학살을 아예 빼거나 왜곡해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과 일본은 교과서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고 한다.

어쨌거나 1972년 중일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고, 그때 중국의 주은래 전 총리가 「역사를 거울로 삼아 미래를 개척하자.」라고 제시했다고 한다. 역사는 하나의 거울인즉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중국 침략 일본군의 남경대학살 기념관 해설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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