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삶이 머무는 곳
어제와 오늘 삶이 머무는 곳
  • 임현택 <수필가>
  • 승인 2015.04.21 19: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수필가>

아이들의 방울 같은 웃음소리가 점점 사라진 마을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그나마 마을회관 옆 어르신들이 함께 모여 교유할 수 있는 경로당은 사람의 향기가 솔솔 묻어나는 유일한 곳이다. 한쪽 벽에는 지팡이들이 나란히 줄맞추듯 기대어 서 있고, 다른 쪽 마당 언저리에는 아기들의 유모차 같은 것들이 나란히 주차돼 있으며 그 사이에 네발로 된 지팡이도 있었다. 마당 풍경만 보면 굳이 할아버지 방, 할머니 방을 말하지 않아도 단박에 알아낼 수 있다. 동네 어르신들이 매일 모여 점심을 드시면서 무료한 시간을 서로 달래고 계시는 만남의 광장인 것이다.

해넘이가 시작될 무렵이면 경로당에 기대선 지팡이와 보행기들 이른바 성인용보행기가 하나, 둘 떠난 자리에 흔적만이 남아 있고, 그 위에 느릿느릿 네발 지팡이를 짚고 가시는 할머니의 아픈 긴 그림자가 덧칠한다.

먹구름이 몰려와 천둥 번개가 치고 벼락이 치듯이, 노부부가 살고 있는 댁에 어느 날 벼락이 떨어졌다. 노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3대 질병 중에 하나인 중풍으로 할머니가 쓰러진 것이다. 중풍 후유증으로 편마비가 되어 거동을 할 수가 없으며 어눌한 말씨, 인지장애, 지각장애는 물론 대, 소변조차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편마비로 움직임이 둔해지면서 온갖 짜증과 히스테리는 가족들과 주변사람들조차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지팡이를 집어던지기도 수십 번, 폭언과 폭행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고집은 누구도 감당 못할 정도다. 당신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식구들 가슴에 대못을 박는 소리는 물론, 시소타기 하듯 매 순간마다 수시로 변하는 감정의 기복은 온 집안을 우울하게 물들이고 주변사람들조차 떠나게 만들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가족들의 발길도 서서히 줄어들고 힘겨운 모든 수발은 배우자의 몫이 되었다. 긴병에 효자 없다하지 않던가. 당신도 허리가 구부러지고 보호를 받아야 할 노년인데 수발을 들자니 어찌 그 어려움을 말로 표현을 다 할 수 있겠는가. 굳이 흑이다 백이다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떤 모습인지 절로 그림이 그려지는 상황이다. 수발을 드시던 할아버지도 지치고 점점 허리통증이 심해지면서 할아버지마저 병들게 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병과의 싸움, 환자와 보호자 모두 지쳤다. 기나긴 병간호에 가족은 노인장기요양보험에 등록을 하였다. 고령이나 노인성 질병 등으로 인하여 일상생활을 혼자 수행하기 어려운 노인 등에게 신체활동 또는 가사지원 등의 장기요양급여를 사회적 연대원리에 의해 제공하는 사회보험제도인 것이다.

아직 멀어져간 가족들의 발길이 뜸하지만, 할머니는 사회보험의 케어를 받으면서 어두운 동굴에서 빠져나오듯 조금씩 아주 조금씩 호전되어 집안에서 거동을 하게 되었다. 비록 부축을 받으며 걸음마 연습하듯 지팡이에 의존하여 걷지만 그늘진 얼굴엔 미소가 생기고 활력이 돋아 경로당에도 가신다. 마음이 앞서 때론 넘어지고 뜻대로 되지 않아 포기하고 싶고 부아가 치밀어 오를 텐데, 화를 삼키며 인내하는 모습이 아리기도 하다. 

매일 땀으로 목걸이를 만들며 찾는 경로당, 누구나 쉽게 드나드는 그곳이 할머니에겐 유일한 소통의 공간, 희망 정거장인 것이다. 그곳은 남은 황혼을 희망차게 물들이고 있는 희망 발원지인 셈이다. 비록 청춘이 멀리 달아나 가고 갈아 탄 노년의 시간이 빠르게 달려가고 있지만,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대문을 박차고 나온 할머니의 무지갯빛 삶이다. 

노을이 내린다. 우둔한 발걸음으로 담장에 걸린 허연 호박넝쿨과 노을을 지팡이로 휘휘 저으며 아픔을 떨어내듯 걷어낸다. 그리고 품에 희망을 안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