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천 들녘에 부는 바람(1)
미호천 들녘에 부는 바람(1)
  •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5.04.1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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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우리 국토의 3분의 2는 산(山이)다. 그리고 산은 전쟁에 대비한 산성(山城)을 낳았다. 우리나라는 산성의 나라이다. 산성은 그중에 신라가 집요하게 차지하고 있었던 충북 지방에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충북은 가히 성(城)의 고장이라고 할 만큼 곳곳에 크고 작은 성들이 많다. 연구에 의하면 남한에는 2500여개의 성이 있으며 충북에만 약 210여개가 있다고 한다. 공격과 방어를 겸했던 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접경 지역이었던 우리 고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성은 국방상의 기능에 충실한 축조물이지만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유적이 되기도 한다. 류성용(1542~1607년)은 임진왜란 회고록인 <징비록>을 통해 산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은 산성이 아닌 우리 고장의 유일한 토성을 알아보기로 한다. 청주의 무심천과 미호천이 합류되는 동쪽 평야 한가운데는 흙으로 만들어진 네모난 토성(土城) 하나가 있다. 산악지형의 지리적 이점을 효과적으로 잘 활용한 산성과 달리 평지에 쌓아 커다란 제방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성이 바로 서울 풍납토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토성인 정북동(井北洞)토성이다.

청주 오근장동의 미호천변에 있는 정북동토성은 이러한 삼한시대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소중한 유적이다. 넓은 들판 한가운데 자리잡은 야트막한 토성은 농토를 지키고 경작한 곡식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공격하는 사람들의 무기도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이다. 또 적을 막아내는 능력도 무거운 돌을 가져다 성을 높이 쌓는 것 밖에는 별다른 방어시설을 갖추지 못했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농기구가 발달하면서 더 많은 곡식을 거두어 저장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뺏고 빼앗길 대상이 되었다. 결국 무기가 발달하게 되고 저장된 농산물을 둘러싼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농경지대를 중심으로 곡식을 저장하고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 드디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평지에 쌓은 정북동토성의 평면은 기다란 네모꼴의 장방형이다. 성의 길이는 675m (동벽 185, 서벽 165, 남벽 155, 북벽 170)이고 높이는 약 3.5m, 폭은 8~13m 정도 된다. 성벽 윗부분은 너비 2m 정도의 길이로 성벽을 한 바퀴 돌 수도 있다. 성 벽의 네 모서리에는 곡성(曲城) 모양을 이루고 12개가 있다. 남문 터와 북문 터는 좌우의 성벽이 어긋나게 만든 것이 특징이며 옹성의 초기 형태로 주목받고 있다. 이것은 적이 성으로 곧바로 들어올 수 없도록 만든 것으로 성문의 수비를 강화하는 옹성과 같은 개념이다. 동문 서문과 함께 모두 4개의 문을 가지고 있다. 성의 네 모서리는 다른 곳보다 높이 쌓아 성 밖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유리하도록 만들었다. 

성안에서는 주거지와 기둥구멍, 길, 돌무더기 등이 발견되었고, 성 밖에서는 성을 둘러싸 보호하는 물길인 해자(垓字)를 확인했다. 해자란 주로 평지에 쌓은 성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성 둘레를 파고 그곳에 물을 가두어 적이 쳐들어올 때 방어와 공격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우리나라의 성은 주로 산을 이용한 성이라 해자를 쉽게 찾아보기 어렵지만 평지에 쌓은 일본이나 유럽의 성들은 해자가 매우 넓고 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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