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시대의 봄
계몽시대의 봄
  • 최 준 <시인>
  • 승인 2015.04.1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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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 앞에서
최 준 <시인>

영국 시인 T.S. 엘리엇은 그의 장시 <황무지(荒蕪地)>를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그로테스크한 구절로 시작했다. 소생과 부활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그의 ‘잔인한 4월’이 지금 우리에게는 역설이 아닌 직설로 들린다. 계절은 꽃 피고 새 우니 “이웃들아, 산수구경 가자”는 정극인의 <상춘곡>이지만 심정은 겨울이 계속되고 있는 지난하고 난감하기만 한 현실 말이다. 둘러보면 주변에는 볕이 들지 않는 계곡 음지처럼 지난겨울의 적설이 그대로 쌓여 있고 바닥까지 꽁꽁 얼어버린 실개천 가슴의 얼음장은 맑고 투명한 흐름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우리의 미래이자 꿈인 청소년들이 바다에 수장된 지 한 해가 되었는데 정부와 국회는 이 국가적인 대재앙을 두고 여전히 갑론을박만 계속하고 있다. 추모는 추모이고 해결은 해결인데 선심이나 쓰듯 사고를 당한 학생들의 모교인 단원고에 위로금인지 보조금인지를 지급하는 게 다인 정부를 민중은 어떻게 믿고 살아가라는 것인가. 고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게 금전적인 보상일지, 진실 규명일지 정말 아무런 생각도 없는가.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과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피맺힌 목소리는 외면하면서 경제와 돈만 거론하고 삶의 외면만을 치장하느라 OEC D 국가들 중 국민행복지수 최하위권의 나라가 된 책임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 것인지. 네 탓이라고 어제도 오늘도 서로를 향해 삿대질만 해대는 정치 현실이 개탄스럽다.

이 땅의 정치는 어리석고 가난한 민중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전부였던 계몽시대를 고집스레 헤매고 있다.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친구가 아니면 적이라는 단순한 논리를 앞세워 민중의 삶을 담보로 저들만의 리그를 숨바꼭질하는 ‘오페라의 유령들’이다.

잘잘못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서로가 숨겨들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약점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저들의 치졸한 승부판에서 죽어나는 건 관객인 민중이다.

민중은 정규시간이 아닌 인저리 타임의 삶이 언제 끝날지 가슴 졸이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민중을 현실에 안주하게 만들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소극적인 보수성으로 근본적인 삶의 질을 망각하게 한다. 이것도 정치적인 전략의 하나라면 정치 행위는 악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민중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이지만 그들은 민중이 쥐어준 권력을 민중의 삶을 사랑하는 데에 온전히 바치고 있는지 함께 머리 맞대고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그들은 민중들을 자신들과 같은 사고체계와 가치관을 지닌 항등의 존재로 여기고 있는가. 민주주의 체제에서 민중이 부여받은 권리라는 건 기껏해야 선거권이 전부다.

다수의 의견은 절대가 아닌데도 선거라는 의례를 거치는 순간에 다수의 선택은 옳고 그름을 떠나 정당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소수의 의견은 다수에 묻히고, 무시당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수의 관심 영역 밖으로 서서히 밀려나고 만다. 민중의 분열은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이다. 그들은 민중이 언제까지나 분열되어 서로 대립하기를 바란다. 그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건 민중의 결집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그렇다. 소수의 당신들 때문에 다수인 우리들마저도 먹고 살기 힘드니 이제 그만 하라는 주문 말이다. 어리석은 민중은 시간이 지나면 어제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눈앞의 현실에만 골몰하는 존재들이니 버티면 다 해결된다는 정치적인 기만술에 왜 자꾸만 속고 사는 것일까.

바야흐로 만화방창 봄꽃의 시절인데 꼬이고 접힌 우리 사회의 매듭들은 어느 하나도 속 시원히 풀릴 기미가 없다.

/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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