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천을 경계로 3000년 전에 마을이 존재했던 청주
무심천을 경계로 3000년 전에 마을이 존재했던 청주
  • 김명철 <청주서경중학교 교감>
  • 승인 2015.04.15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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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서경중학교 교감>

청주 IC에서 강내를 지나 조치원을 향하는 길에 멀리 오른쪽으로 미호천과 합쳐지는 병천천(竝川川)이 보인다. 

이 병천천을 바라보는 나지막한 구릉에는 큰 과수원이 하나 있었는데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집터가 발견됐다. 4500년 전 이곳에 신석기 사람들이 미호천 주변의 기름진 땅을 터 삼아 농사를 짓고 살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둥글납작한 바닥을 지닌 토기의 윗부분에 똑같은 모양의 무늬를 가득 채워 넣은 새로운 형태의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됐는데 이러한 토기들이 충북 영동 금정리와 대전 둔산동 등 금강유역에서만 나타나고 있어 이를 ‘금강식토기(錦江式土器)’라 부른다.

청주는 역사적으로나 현재 교육 시스템으로나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 최고의 교육 도시임이 틀림없다. 자녀 교육을 주거 조건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는 현대 부모님들의 눈에도 청주는 가장 살기 좋은 도시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청주시에 이미 3000년 전에 크고 작은 마을이 있었다. 

청주 용정동에서 네모난 집터가 발견됐다. 청동기시대는 청동기를 사용하던 시기를 말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재료가 귀해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인 의기(儀器)나 장신구에 주로 이용했고 대부분 사람들은 간 돌칼, 돌도끼, 홈자귀, 돌화살촉 등과 같은 다양한 간석기를 사용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 청동기시대 무심천가의 크고 작은 구릉지대에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작은 개울과 넓은 들판을 내려다보며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용정동과 금천동 일대를 포함해 현재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섰지만 금천(金川·쇠내개울)을 낀 구릉지대의 정상부에서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집터가 발견된 것이다. 주로 긴 네모꼴을 하고 있는 10여 채의 집터는 대체로 짧은 쪽 벽면의 길이가 약 3~6m, 긴 쪽의 벽면은 약 5~10m 정도였는데 10m가 넘는 큰 집터도 확인됐다. 금천동과 용정동에 살았던 우리 조상은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곡식을 거둬들이고 사냥도 하면서 살림을 꾸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청주 봉명동에서도 둥근 집터가 발견됐다. 지금은 흥덕경찰서를 비롯해 한쪽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지만 청주 무심천의 서북쪽 봉명동의 넓은 구릉지대에도 청동기시대 마을이 있었던 것이다. 37채에 이르는 집이 있었던 이 마을은 길이 3~7m, 너비 2~6m 정도의 네모꼴 집터와 함께 지름이 3~6m 정도의 둥근 집터가 확인됐다. 봉명동 집터의 주변에서는 논과 밭 등 당시의 농경지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봉명동 사람들도 반달돌칼, 돌살촉, 갈판 등 농경생활과 관련된 도구 등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농사를 지으며 살았을 것이다.

무심천을 경계로 동쪽에는 금천동 일대에서, 그리고 서쪽에는 봉명동 일대에서 다양한 형태의 집을 짓고 농사일을 하면서 옹기종기 모여서 행복하게 살았을 조상의 모습을 생각하며 오늘날 청주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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