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덕사지 발굴의 추억(2)
흥덕사지 발굴의 추억(2)
  • 박상일 <역사학박사·청주대박물관>
  • 승인 2015.04.09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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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박상일 <역사학박사·청주대박물관>

지난 글에서 우여곡절 끝에 운천동의 이름 없는 절터를 찾아낸 데 이어 발굴을 하여 ‘흥덕사’ 글씨가 새겨진 금구를 발견함으로써 절터 명칭을 확인하고, 아울러 『직지』를 인쇄한 바로 그 흥덕사지로 세상에 드러나게 된 사연을 소개하였다. 

한정된 지면에 간략하게 서술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후 모임 때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달라는 사람들이 있어 앵무새처럼 몇 번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숨겨진 이야기 몇 가지를 더 털어놓을까 한다. 

1985년 10월 흥덕사지가 확인되자 한국토지개발공사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택지개발을 하던 중에 난데없이 절터를 발굴하여야 한다고 하여 공사를 중지하고 발굴비용까지 대줬더니 이제는 보존하여야 한다고 하니 그들로서는 황당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흥덕사지와 직지가 연일 언론에 보도되고 청주가 고인쇄문화의 메카로 부각되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겠지만, 보존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1만여 평을 사적지로 보존하였다가 일종의 여론몰이도 작용하여 후에 면적이 두 배로 늘어났다. 

여기서 숨기고 싶지만 밝히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1984년 11월 29일 필자가 처음 흥덕사지를 발견하였던 그날은 절터가 전혀 훼손되지 않고 온전하였다. 

충청북도에 절터 보존을 전화로 요청하고 다시 사진과 평판측량을 첨부한 공문으로 접수한 후 행정조치가 이루어졌는데, 시행사인 한국토지공사에 공문이 시달되고 다시 시공업체와 하청업체에 공문이 전해지는 과정에 한 달 정도가 소요되면서 택지공사가 그대로 진행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절터가 절반 가까이 훼손된 상태에서 발굴하게 되었다. 그나마 천만다행이랄까 절터 중심부에 묘소 1기가 있었는데 묘소 이장이 늦어지는 바람에 묘소 바로 앞까지 흙을 파내어 가고 묘소 안쪽은 원형이 살아남았다. 발굴을 해보니 절터는 이미 대각선으로 길게 3분의 1쯤 잘려나간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묘소가 정확히 금당의 중심 즉 불상이 안치되었던 자리에 묘광을 파고 시신을 매장하였던 것이다. 후에 지도위원으로 발굴현장을 찾은 진홍섭 교수가 ‘산 자가 훼손하는 유적을 죽은 자가 지켰다’고 하신 말씀이 지금도 귓전에 맴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위기일발의 순간에 절터를 찾아 발굴하고 오늘날 사적으로 보존하게 된 것은 내 생애 최고의 보람이면서도 발굴 전에 일부 훼손된 일에 대해서는 천추의 한으로 남는다. 

흥덕사지는 발굴조사 이후 철조망으로 둘러친 채로 한동안 방치되었다. 흥덕사지 언론발표와 동시에 보존정비 및 고인쇄박물관 건립을 관계기관에 요구하였지만 넉넉하지 못한 지방재정으로는 즉시 추진이 어려웠던 것이다. 이때 큰 도움을 준 사람이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경부고속전철 건설을 계획하고 고속철도 선진국들과 접촉하고 있을 때인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나라가 프랑스였다. 프랑스 테제베의 기술도입을 위해 전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하였고,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엘리제궁에서 한국 대통령을 맞이하면서 깜짝쇼 하듯이 직지 원본과 신라 혜초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 원본을 보여주었다. 

이 뉴스를 접한 관계 당국은 초비상이 걸려 바로 다음날 이원홍 문공부장관과 김원용 문화재위원장이 청주에 내려와 필자의 안내로 현장을 둘러보았고, 노건일 충북지사도 여러 차례 흥덕사지와 출토유물이 보관된 청주대박물관을 방문하였다. 외국 대통령의 외교적 특별배려로 직지를 친람한 대통령의 귀국 후에 특별지원금이 내려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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