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의 미학
찌의 미학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5.04.08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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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나는 낚시를 좋아할까? 아직 잘 모른다. 적어도 낚시에 미치지는 않았으니 낚시광(狂)은 아니다.

내 주위에는 낚시광이 있었다. 젊은 날 만난 그분은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노릇을 하다가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대학에 다시 들어왔는데, 정말 마니아였다. 

특징 1. 버스에서 졸다가도 손을 당긴다. 붕어가 잡힌 것이다. 꿈에서. 특징 2. 치질인데도 쪼그리고 앉아서 밤새기를 좋아한다. 낚싯대만 앞에 있다면. 특징 3. 술은 한 잔도 안 먹는다. 군대에서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안 먹었다. 특징 4. 말이 없다. 이건 낚시꾼들의 일반적인 특색이다. 조용하고 차분하다. 

나는 그 양반과 정반대의 인격이다. 꿈에서는 여인만 나오고, 잠이 많고, 술도 먹고, 말도 많다. 낚시보다는 매운탕에 소주 한 잔 먹는 모습이 더 어울린다. 

그런데도 그 목사님은 나를 낚시의 후예로 인가했다. 언젠가 함께 떠난 낚시 여행에서 한 마리도 잡히지 않는 밤을 지새고 있었다. 다들 텐트로 들어가자는데, 나는 동이 틀 때까지 그저 혼자 앉아있었다. 그러다가는 월척을 해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들어가 잤는데, 아침에 잡힌 물고기를 보더니 ‘낚시 잘하겠어’라며 인가를 해버렸다. 특히 낚시를 당기는 감각이 좋다나 뭐라나.

대학에 자리 잡으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중견교수님이 내 방에 찾아오셨다. ‘철학을 하는 사람이 낚시를 배워야지.’라며 손수 제작하신 찌를 선물로 주시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찌를 직접 만든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어 신기했는데, 그러면서 낚시회 가입을 권유하셨다. 나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언젠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낚시였지만(나이 들어 배우겠다는 것이 바둑인 것처럼) 아직까지는 시간을 그렇게 쓸 시간이 없다는 핑계였다. 젊어서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이 들어 할 일이 따로 있는데, 나이 들어서 할 일을 젊어서 하면 나이 들어서 할 일이 없다는 궤변이었다. 젊어서 바둑을 배워놓아야 늙어서 잘 둘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교수님이 주신 두 쌍의 찌를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한 쌍은 캐비닛 위에 붙여놓았는데, 여름에 창문을 열어놓고 있으면 바람에 살랑거리는 것이 여간 상쾌한 것이 아니었다. 

더운 맨 위 사층 방에서 복도 양쪽 창문을 열어놓고 바람을 맞이할 때 누구라도 바람의 아들이 될 수 있었다. 에어컨은 언감생심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쌍은 집에 차구를 두는 통에 꼽아두었다. 마음이나마 낚싯대를 드려놓고 차 한 잔 마시겠다는 심보였다. 일본가옥구조에서 부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다실인데, 비록 그런 낭만은 즐기지 못하더라도 차와 차구를 놓는 곳은 있어야 했다. 찻잔 속의 태풍이 아니라 찬장 속의 낚시터인 셈이다. 결국 나는 그 교수님 덕에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늘 낚시를 즐길 수 있었다. 

원로가 된 그 교수님이 얼마 전에 나를 찾아와서 차구에 꼽혀있는 찌를 보더니 ‘아니, 초창기의 습작을 꼽아놓게 할 수는 없다’며 바로 비장의 찌 하나를 보내오셨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게 잘 생긴 놈이었다. 지금 내 방의 차구에 한 쌍이 작은 찌와 그보다 훌쩍 키가 큰 찌 하나가 꼽혀있는 연유다. 그리고 그 밑에는 아주 큰 부채 하나도 꼽혀있다. 

어떤 낚시광은 말했다. 해질 무렵 수면의 무늬에 취해 있을 때 차갑게 이는 찬바람이 겨드랑이 사이를 흩고 지나갈 때가 바로 낚시의 참맛을 느낄 때라고. 나는 오늘도 콘크리트 건물 속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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