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에 담긴 타임캡슐 고인돌
무덤에 담긴 타임캡슐 고인돌
  • 김명철 <청주서경중학교 교감>
  • 승인 2015.04.01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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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서경중학교 교감>

큰 돌을 가지고 만든 무덤인 고인돌은 우리나라 선사시대 유적 중에서 일반인들에게 가장 쉽게 알려졌다. 무덤의 특이성과 함께 그 수에 있어서도 아주 많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조사된 고인돌 수는 강화도, 전북 고창, 그리고 전남 화순 지역 등 약 3만기에 이른다. 전 세계 고인돌의 50% 이상이 우리나라에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되어 가히 고인돌 왕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충북에도 약 200기 정도가 현재 조사됐다. 선사시대부터 인류는 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생활하였던바 지금까지 조사된 고인돌은 주로 강의 흐름을 따라 분포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인돌 덮개돌의 긴 쪽이나 무덤방 방향이 물의 흐름과 나란히 만들어진 것이 일반적이다.

충주·제천지역을 흐르는 남한강은 선사시대 사람들에게 더없이 알맞은 삶의 터전이었다. 앞서 살핀 구석기 신석기 유적과 함께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유적 또한 많이 남겨 놓았다. 고인돌은 덮개돌을 받치는 고임돌의 형식에 따라 탁자식(북방식), 바둑판식(남방식), 구덩식(개석식)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구덩식 고인돌이 많이 분포됐다.

가끔 우리는 역사를 통해 놀라운 경험을 하기도 한다. 황석리 고인돌에서 나온 인골이 서양인이란 사실에서 놀라게 된다. 지금은 충주댐 건설로 물속에 잠겼지만 제천 금성면 황석리 마을 앞뜰에서는 대규모 고인돌 떼가 발견됐다. 남한강 강물을 따라 46기의 고인돌이 2줄로 분포하고 있는데 같은 지역의 고인돌이라도 각각 조금씩 다른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구덩식 고인돌이 많은데 덮개돌 밑의 무덤방을 만든 방식이 여러가지로 조사되었다. 이 지역의 고인돌 조사는 1962년부터 시작되었으니까 아주 일찍 시작된 셈이고 그만큼 고인돌 연구에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 고인돌이 주목받는 이유는 1962년과 1983년 두번의 조사에서 모두 사람뼈가 나와 고인돌이 무덤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13호 고인돌에서 나온 사람은 174㎝에 30대 초반의 남자로 간돌칼이 함께 나왔는데 뼈 부스러기로 연대 측정한 결과 기원전 약 500년 전의 사람으로 밝혀졌다. 뼈의 특징들을 통해 현재 한국인의 골격보다 조금은 큰 사람으로 일부는 북방계통의 사람으로, 또 어떤 학자는 백인으로까지 추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충주댐의 바로 아래 지역에 있는 조동리 지역은 남한강 유역의 대표적 신석기 청동기시대 유적이다. 조동리 선사유적박물관이 위치한 지역에서 북쪽으로 약 2㎞ 정도 올라가면 탑동마을이 나온다. 바로 이곳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민가 앞에 고인돌이 위치한다. 조그마한 돌들을 고임돌로 하고 덮개돌을 올려놓은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불교의 영향으로 커다란 덮개돌 위에 조그만 돌을 마치 탑처럼 또 쌓아서 동네 이름이 탑동이 됐다 한다.

덮개돌의 긴 방향이 강물의 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다른 지역의 고인돌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주변의 조동리 청동기시대 유적지의 존재로 볼 때 더 많은 고인돌의 존재 가능성도 있는 지역이다. 비록 1기이지만 조동리 지역에 주거지와 무덤이 한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 그 의의가 높다.

우리나라 고인돌의 존재는 어떤 지역에서도 그 가능성은 존재하고 있다. 조금은 못생긴 바위라도 한 번쯤은 의심해 볼 필요가 있고 내가 밟는 작은 돌멩이 하나도 역사적 사연이 있으며 역사적 존재 의미가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더욱 내 고장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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