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여, 사월이여
봄이여, 사월이여
  • 김기원 <편집위원·청주대 겸임교수>
  • 승인 2015.04.01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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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편집위원·청주대 겸임교수>

새해가 왔나 했는데, 벌써 사월이다. 봄이 오나보다 했는데, 어느새 사월이다. 청양의 해 사월이 화려한 벚꽃을 대동하고 개선장군처럼 왔다. 그러나 민초들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었으니, 봄을 만끽할 겨를도 없이 사월을 맞는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 시인 T.S 엘리엇(1888~1965)은 그의 대표작 황무지에서 ‘사월을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이라고 노래했다. 

아무리 사월이 만물이 약동하는 생명의 계절이라 할지라도, 아름다운 라일락꽃을 피운다 해도, 희망이 없으면 차라리 눈 덮인 겨울이 따뜻하다고.

엘리엇은 그렇게 얼어붙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현대인들에게 약동과 변혁을 일깨우는 봄의 정신, 그 숭고함을 역설했다.

그렇다. 분명 사월은 아름답고, 봄은 숭고하다. 사월의 생명들은 모두 존귀하고, 봄의 약동과 변혁은 희망을 부른다. 사월은 삼월과 오월의 한가운데 있는 그야말로 봄의 본령이자, 희망과 젊음과 정의를 잉태하는 가장 봄다운 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세기 전만해도 우리 민족에게 사월은 춘궁기라는 참으로 고달픈 달이었다. 진달래꽃과 꾀꼬리 울음소리가 허기진 아이들의 위안이 되었던 한 많은 보릿고개. 이 땅의 민초들은 풀뿌리로 연명하며 끈질긴 생명력으로 고난의 보릿고개를 넘어왔다. 

그렇게 서러웠던 보릿고개를 박물관에 박제시킨 자랑스러운 세대들이 바로 4.19세대들이다. 

4.19 정신이 바로 봄의 정신이었다.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부패한 이승만 독재정부를 피 흘려 무너뜨렸고, 민주주의를 회생시켰다. 하여 사월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4.19를 떠올렸고, 민주항쟁의 고귀한 희생과 넋을 기렸다. 

사월은 이처럼 많은 젊은이들이 뜨거운 피로 민주주의를 지켜낸 자랑스러운 달이다. 덕분에 헌정사에 많은 정치적 부침이 있었고, 민주주의도 여러 차례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우리 국민들은 그때마다 온몸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했고, 동시에 산업화도 이룩해 대한민국을 G20 국가로 우뚝 서게 했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물론, 복지적 민주주의까지 실현해 왔고, 아직은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경제적 민주주의도 이룰 채비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대한민국의 사월은 참으로 잔인한 달이었다.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비극이었고 치욕이었던 세월호 침몰로 인해 四月이 死月이 되었다. 

우리 국민들은 지난해 4월 16일 생때같은 수많은 생명들이 수장되는 참으로 어이없는 모습을 TV와 인터넷을 통해 두 눈으로 목도하며 경악했고, 발을 동동 구르며 비명을 지르고 피눈물을 흘렸다.

어린 생명들을 선실에 남겨둔 채, 저만 살겠다고 배에서 탈출한 선장과 기관장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었다. 한없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유가족들은 시신이라도 찾으려고 팽목항을 떠나지 못했고, 애꿎은 국민들은 죄인처럼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고 한동안 상주처럼 살아야 했다. 

천박한 자본주의와 허술한 사회안전망과 정부의 위기관리 무능이 불러온 총체적 부실이었다. 위기 앞에 속수무책인 대한민국의 위기관리 능력에 망연자실했고, 함께 분노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국민안전처를 만들고, 세월호특별법도 제정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오히려 국민들의 안전 불감증과 건망증으로 도로 아미타불이 될까 염려스럽다.

아무튼 무심한 세월은 흐르고 흘러 그렇게 死月이 되었던 잔인한 사월을 다시 맞는다. 그래도 산자는 사월을 사월답게 살아야 한다. 오 봄이여, 4.16이여, 4.19여, 사월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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