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그리고 또 십 년
십 년 그리고 또 십 년
  • 정상옥 <수필가>
  • 승인 2015.03.30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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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상옥 <수필가>

가물가물하다.

아니, 그 순간은 기억이 완전 딱 사라져버렸다는 표현이 더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잠시였지만 실종된 기억을 헤집으며 실낱같은 흔적들이라도 찾아내려는 가상한 내 노력을 들킬세라 더 환한 미소만 지으며 목석처럼 서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지 사십여 해가 지나서야 동창회에 정식으로 참석했다. 유년의 옛 친구들과 오랜만의 만남에 반가움을 표현 해야 함이 먼저였건만 솔직한 나의 심정은 어색한 해후임을 속일 수 없어 호들갑스런 인사말보다는 미소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이 자기 이름을 먼저 말하며 인사를 건넸지만 파릇하게 다시 살아나지 않는 내 기억의 한계에 부딪히자 급기야 자괴감까지 들었고 이방인처럼 생소하고 어색한 자리가 내심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몇몇 친구들이 나를 보며 단번에 알아보고 반색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 자리에 온 것을 살짝 후회하며 되돌아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흐르는 시간은 참 때때로 묘한 처방이 된다. 

한 친구가 지나간 유년의 시간을 상기시키며 추억을 끄집어내자 어색하던 기류가 점점 침잠되어갔고 일순간에 각자 현재의 삶은 모두 뒤로 제켜둔 듯 사 십여 년 전의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 자연스럽게 사춘기시절의 한마음이 되었다. 모두는 그렇게 다시 어린 친구가 되어 서로를 회상하며 추억담들을 상기해내니 그때서야 굳게 잠긴 내 기억의 문도 서서히 열리는듯했다.

세월의 무게에 눈에 보이는 외양은 달라졌어도 까까머리 남자 중학생과 연분홍빛으로 양 볼이 발그레하던 여중생들은 순진무구한 내 친구들로 추억 속 그 이름 그대로 늘 한곳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나 또한 고향집에 온 것처럼 그 자리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참 따뜻하고 푸근해졌다.

사십 년이란 시간을 곱씹어보면 무수히도 많은 하루의 반복이다. 수많은 반복 속에서 퇴색되어진 흐려진 기억을 탓하기보다는 무심히 흘러 가버린 세월 속에 무디어진 감정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더 현명한지도 모를 일이다. 

십 년, 그리고 또 십 년씩 네 번의 세월 속에서 상승하강 기류를 타며 살아오는 동안 나는 여중생 그때의 모습에서 얼 만큼이나 비켜가고 또 그 시절의 순수한 시간의 흔적들을 얼마큼 간직하며 살아왔을까. 하루의 시간이 지루할 만큼 길다고, 혹은 너무 짧은 하루를 탓하며 자투리 시간마저 알뜰히 주워담듯 동분서주하며 살아온 반세기를 넘긴 세월들을 유추하니 그 안에 그러진 삶의 그림들이 참으로 다양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에서 바로 전의 십 년이란 시간만을 되짚어 봐도 참 많은 사연이 얽혀져 있다. 바람막이로 등불처럼 영원히 계셔 줄 것만 같던 부모님도 이젠 손에 닿을 수 없는 먼 곳으로 가셨고 병아리 같던 내 아이들도 어느덧 성년이 되어 큰아이는 내 품을 떠나 또 하나의 둥지를 틀고 그 안의 안주인이 되어 있지 않는가. 

돌이켜보면 지우고 싶은 부끄러운 자화상도 많지만 내가 살아가는 앞으로의 십 년, 그리고 또 십 년을 보낼 때에는 노고와 노력들로 엮어진 삶의 내실들을 다듬고 사려서 더 튼실해지고 꿋꿋해지리라. 한겨울의 모진 풍파 이기고 봄이 되면 여지없이 피어나는 새싹들처럼. 

짧은 몇 시간 동안 아련한 추억에 잠기다 돌아오는 밤길에는 상현달빛이 유난히도 맑아 보였다. 아직은 쌀쌀한 밤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머지않아 봄꽃이 방울방울 터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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