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달리는 경기
함께 달리는 경기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5.03.2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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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수안 <수필가>

과수원마다 분주하다. 복숭아나무는 꽃눈을 부풀리느라 여념이 없다. 오달지게 열린 꽃눈을 솎는 촌부의 밭에서는 트로트가 흘러나온다. 건너편 과수원은 봄 소독을 하는지 소독차가 오간다. 수확이라는 결승점을 향한 기나긴 마라톤 경기가 시작된 것이다. 

경기는 땅바닥에도 시작되었다. 벌써 꽃대를 올리는 냉이 사이사이로 민들레가 먹기 좋을 만치 올라왔다. 몇 포기 오려 일어서는데 달래 무더기가 보인다. 아무리 바빠도 싱그러운 봄나물을 보면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세월아 네월아 유유자적하며 캐야 나물 캐는 맛이 나겠지만 나는 민들레 오리던 삽날을 달래 무더기 옆에 대고 푹 밟는다. 삽자루를 젖히자 흙 속에서 하얀 뿌리가 오모르르 쏟아진다. 달래 향을 좋아하는 둘째딸 얼굴이 스친다. 쪼그리고 앉아 진주알 같은 달래 뿌리를 거두는데 탱탱하게 잡히는 촉감에서 작은 행복을 느낀다. 

나는 봄나물을 얻기 위해 특별히 한 것이 없다. 안 하기는커녕 낫으로, 예취기로 베어내는 것도 모자라 차광망으로 뒤집어씌우며까지 없애지 못해 안달이었다. 농사짓는 내내 웬수 보듯 하는 잡초라 불리는 것들, 포도농사를 위해, 또는 복숭아농사를 위해 어떻게 없애야 잘 없앨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나.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강자인 풀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번식을 위한 씨앗을 성공적으로 남기고 경기를 마친다. 

달래 향기 폴폴 풍기는 된장찌개를 상상하며 나오다 작년에 심은 복숭아나무를 들여다본다. 꽃눈이 조롱조롱 매달렸다. 이제 겨우 2년생이지만 존재감을 드러내는 어린나무가 대견하다. 

나도 내일은 복숭아나무에 봄 소독을 할 참이다. 그러자면 봄 내내 이것저것 실어 나르며 부리던 SS기 운반차를 떼어내고 분무기를 달아야 한다. 엄두가 나지 않아 이장님에게 전화를 건다. 아직 일하는 중이라며 기다리지 말고 퇴근하라고 하신다. 늦은 시간에라도 와서 내일 아침에 소독할 수 있도록 분무기를 달아주겠다는 것이다. 

이장님과 나는 혈육도 아니고 동창도 아니며 오랜 친구도 아니다. 다만 9년 전의 동네 이장님과 그때 이사 온 새로운 주민의 관계일 뿐이다. 장정 없이 농사짓는 나는 장정의 힘을 빌려야 할 때가 있다. 농기계 조작이 어려울 때나 무거운 것을 들어야 할 때이다. 하지만 여자인 나로서는 남정네의 도움을 받기가 조심스러운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장님 내외는 처음부터 어려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마치 오랜 주민을 대하듯 격식 없이 진심으로 나를 대해주었다. 오히려 오가는 길에 우리 과수원을 보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한 마디씩 조언도 해 준다.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은 이장님뿐만이 아니다. 포도농사는 30년이나 지었지만 복숭아 농사 경력은 이제 겨우 2년에 불과한 나. 복숭아 주산지인 이곳에는 모든 이웃이 다 나의 스승이다. 미리네, 하나네, 승희네…. 내가 복숭아나무를 심자 복숭아 농사 전문가인 많은 이웃이 조언해주고 걱정해준다. 이곳에서 혼자 포도농사를 지으며 고민하던 때가 개인 종목의 경기였다면 이제는 함께 달리는 단체 종목을 뛰는 것처럼 든든하다. 

이 경기는 누가 얼마나 빨리 결승점에 도착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풀은 풀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과실나무는 또 그대로…. 그저 자연의 시계에 맞게 출발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뛰어 자연의 시계에 맞게 도착하면 모두 승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함께 갈 수 있는 경기, 나는 지금 단체 종목을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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