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거나 연기가 나거나(2)
빛나거나 연기가 나거나(2)
  •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5.03.2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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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우리고장 청주 것대산에도 조선 시대에 봉수가 있었다. 것대산은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과 낭성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인데, 상당산성 밖 남쪽에 있는 산으로 거죽을 뜻한다. 즉, 상당산성 거죽에 있는 산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많은 사람들이 상당산성은 잘 알고 있지만 것대산은 모르는 분들도 더러 있다. 상당산성 남암문에서 나와 산성고개에 설치된 출렁다리를 건너면 상봉재가 나온다. 상봉재에서 다시 것대산으로 오르면 멀리 첩첩의 산봉우리들이 보이는 봉수터가 나온다. 것대산 봉수의 정확한 설치시기는 알 수 없으나 봉수제도가 완비된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동서로 긴 타원모양으로 보호벽을 둘렀던 흔적이 남아 있어 1894년 봉수제도가 폐지된 후 방치되어 없어졌던 굴뚝과 방호벽을 다시 복원하였다. 이 봉수터에 있던 묘는 몇 년 전 이장했고 2004년에 봉돈(烽墩)시설 5기를 조성해 놓았다. 봉수대의 근무는 감관(監官)1인과 봉군(烽軍) 5인이 1조가 되어 교대 근무하였다고 한다.

이 것대산 봉수대에는 전해오는 설화가 있다. 조선 영조 때 밀풍군 탄을 추대하여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다. 그들은 영남에서 모의하여 연전연승하며 서울쪽으로 올라오니 상당산성과 청주읍성마저 함락이 되었다. 그런데 상당산성에서 마주 보이는 것대산 봉수가 진천을 거쳐 안성 서울로 올라가는 것을 염려한 이들은 휘하 군사 두 명을 시켜 봉수지기의 목을 베도록 지시하였다. 당시 봉화지기 목씨 노인에게는 선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같은 동네에 사는 백룡 총각과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 총각이 청주 장날 돗자리를 팔러 나갔을 때, 군사들이 목씨 노인을 살해한 것이다. 그것을 본 선이는 반란군임을 눈치채고 봉수대로 달려가 불을 붙이다가 뒤쫓아 온 반란군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한참 후 백룡이 돌아와 보니 노인은 죽어 있었고, 선이도 보이지 않자 봉화대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선이의 죽음을 본 총각이 쇠스랑으로 반란군을 처치하고, 화덕에 불을 돋우어 봉화를 전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 후기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증보문헌비고>에 보면 봉수는 전국에 676기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봉수 전문 학자가 조사한 바로는 1,150여기인데 이중 북한이 650여기이고, 남한이 500여기 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중에서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400여기라고 한다. 1885년 전신. 전화 등 근대 통신 장비가 도입되면서 고종 32년 왕명으로 중단된 이후 방치된 채, 파괴되거나 유실된 봉수가 많다. 이제는 쓸모없어진 시설이기에 다른 용도로 변경되거나 복원을 했더라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시설이 되었다.

것대산 봉수터는 세종대 이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청주 근교의 유일한 봉수대로, 지금은 청주 시민들이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활공장으로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먼 산에서 빛이 나거나 연기가 나면 위험신호였던 시대. 더 빠르게 더 멀리까지 전달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던 날 들이었다. 백성들은 그 불빛을 보고 가슴 졸이며 어디에서 변이 났는지 얼마나 궁금했을까. 그러나 지금 우리는 더 빨리 더 멀리까지 소식을 주고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빨간 우체통을 보면 요즘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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