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백목련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1.01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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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큰언니
오 향 순 <수필가>

언니.
꾸러미 꾸러미 싸서 넣어 준 것들을 풀어 냉장고, 김치 냉장고, 다용도실에 정리를 하고 나니 새벽 한 시가 넘었네요. 먼 길 다녀온 피로감은 몰려오는데 잠은 오지 않고 동생들을 향한 언니의 사랑에 가슴이 아릿해집니다.

며칠 전, 의정부에 다녀올 일이 있는데, 오는 길에 언니 집에 잠깐 들리겠다는 통화를 한 후 언니마음은 부산해졌지요. 그 날 오는 게 확실하냐고, 몇 시쯤 언니 집에 도착할 지, 아무것도 사지 말고 그냥 오라며 여러 차례 걸려온 전화소리에 소풍날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들뜬 목소리가 섞여 있었지요.

따로 챙겨 놓은 배추김치가 부족하다 싶었는지 총각무 김치를 새로 담그고 동생네 식구가 좋아하는 팥죽 한 통까지. 어디 그것뿐인가요. 시댁에서 가져온 찹쌀, 참깨, 햇고구마…. 싸게 팔기에 샀다는 내 옷들.

언니. 아프지 말고 오래 오래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 주길 바라요. 삭정이 울타리가 아닌 싱싱한 나무울타리이면 좋겠어요. 챙겨주려고만 애쓰지 말고 언니 자신을 위해 좋은 것도 사 먹고, 길가다 싸구려 화장품 코너에서 사다 쓰는 화장품 대신 피부에 좋다는 기능성 화장품도 좀 사 쓰세요. 건강하게 언니 자리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든든할 겁니다.

칠남매의 맏딸로 태어나 동생들의 노둣돌이 되어준 언니.

그린 어려운 형편도 아니었는데, 언니가 상급학교에 진학하면 동생들이 고생할까봐 진학을 포기했었다지요. 왜 그리 일찍 철이 들어버려서 고단한 삶을 사셨는지요. 부모님 사랑은 언제나 동생들 차지고 부모님의 살림 밑천인 딸로, 한없는 희생을 요구하는 동생들의 바람막이로 자청했던 삶을 무엇으로 보상해 드릴 수 있을까요. 게다가 가난한 집 맏며느리가 되어 시동생들 뒷바라지까지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그루터기가 되어 주었으니.

내 여고시절 언니의 단칸 방 신혼살림이 얼마나 옹색해 보이던지 언니네 집 갔다 온 날은 괜스레 우울해지고 심통이 났어요. 방구석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부업거리들은 왜 그리 어린 나를 속상하게 했는지. 그러나 9급 공무원의 아내로 알뜰히 살아냈던 그 내핍 생활이 형부를 서기관까지 오르게 했고, 그런대로 사랑을 베풀며 살만한 오늘이 있게 한 기틀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네요. 그토록 값지게 다져온 사랑이기에 그 사랑을 받기만 하기가 벅차서 이렇게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벌써 십년이 지났어요. 원인도 알 수 없는 병명으로 언니가 한 쪽 눈을 잃었을 때 그 아픔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요. 눈을 볼 수 없다는 충격도 컸지만, 언니 스스로 너무 비관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도 많이 했는데, 아픈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두 눈이 건강한 이들보다 더 소외된 자들을 살피고 도우며 의연히 살아가는 모습이 고맙고 자랑스러워요.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알고 게시는 하나님은 물론 천국에 계시는 부모님께서도 언니의 삶을 내려다보시며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꽃을 유난히도 좋아하는 언니. 언니는 꽃을 많이 닮았어요. 언니의 심성이 바로 타인에게 행복을 주는 꽃향기이며, 타인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꽃잎이고, 새로운 꽃을 피워 낼 인고의 꽃씨입니다. 그런 언니를 사랑합니다.

내일 아침이면 언니는 어김없이 전화를 할 겁니다. 어젯밤 고생하지 않고 잘 갔느냐고, 뭐도 뭐도 주려고 했는데 잊었다고 아쉬워하며, 끝없이 퍼 올리는 언니의 사랑이 어둔 밤을 밝히는 창 밖 보름달 보다 더 환하게 내 가슴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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