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흥덕사지 발굴의 추억
청주흥덕사지 발굴의 추억
  • 박상일 <역사학박사, 청주대박물관>
  • 승인 2015.03.26 18: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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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청주시 흥덕사지를 발굴한지도 어느덧 30년이 되었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더니 흥덕사지에서도 이를 실감한다. 흥덕사지 발굴이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던 차에 요즘 증도가자가 논란이 되면서 그때를 다시 추억하게 한다. 1985년 흥덕사지가 확인된 당시에는 세상이 떠들썩하였다. 흥덕사지 확인이 발표된 10월 10일 신문과 TV 등 모든 언론 매체에 톱뉴스로 나갔고 전 세계에도 타전되었다. 그 후 한동안 지역신문에는 거의 매일같이 흥덕사지 관련보도가 나갔고, 방송매체에서도 수시로 특집프로그램을 내보냈다.

흥덕사지가 유명해진 것은 당연히 직지를 인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가 1972년을 ‘책의 해’로 정하고 이를 기념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한 도서전시회에 직지가 출품되면서 현존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국내외에 크게 알려졌다. 그러나 정작 이를 인쇄한 흥덕사 터는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운천동 연당골 절터를 발굴하던 중 ‘흥덕사’가 새겨진 금구가 발견됨으로써 절터의 이름과 함께 직지의 인쇄처를 확인한 것이다.

필자와 흥덕사지 그리고 직지는 전생부터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흥덕사지가 세상에 알려진 과정을 이야기하자면 필자와의 인연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1984년에 운천동 택지개발사업이 시행되면서 무심천변의 절터(현 CCC아카데미센터 북측)를 필자가 근무하는 청주대박물관이 발굴하게 되었다. 발굴을 시작한 며칠후 76세의 한 노인이 현장천막으로 찾아와 담배쌈지에서 신문지로 꼬깃꼬깃 싸맨 동전 두개를 꺼내놓으며 가치가 있는 거냐고 물으신다. 조선시대에 흔히 사용된 상평통보와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하기 위해 만든 당백전이라고 자세히 설명해 드렸다. 그런데 한참후에 다시 오셔서는 집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돌이 있는데 뭔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연꽃무늬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 노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사직동 변전소 옆의 그분 댁으로 달려갔다. 툇마루 앞의 댓돌을 살펴보니 안상(眼象)이 새겨진 석탑 부재였다. 출처를 물으니 예전 살던 집에서 이사 오면서 버리기 아까워 가져왔다고 하신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노인의 안내를 받아 옛집을 찾아가니 그곳이 연당골 지금의 흥덕초등학교 부근이다. 마을 주변에는 많은 기와편이 널려 있었고 뒤편 구릉지 밭에도 와당과 함께 건물주 초석들이 보였다. 틀림없는 고려시대 절터인데 이미 택지개발공사는 시작되어 마을은 다 철거되고 주변에 중장비가 들어와 파헤치고 있었다. 1984년 11월 29일이다.

급한 마음에 우선 도청 담당부서에 전화로 알렸다. 새로운 절터를 찾았는데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며칠 지나면 없어질 것 같으니 조치를 취해 달라고 하였다. 그날 통화를 잊을 수 없다. 왜 공사를 방해하느냐고 전화상으로 엄청 욕을 얻어먹었다.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많은 우여곡절 끝에 공사를 중지하고 발굴을 하게 되었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발굴이 거의 마무리되던 10월 8일 ‘흥덕사’명 금구를 수습하였다. 이는 단순히 절 이름을 찾은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지를 인쇄한 장소를 확인한 것이다. 그날의 전율과 희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0월 10일 언론에서는 대서특필하였고 흥덕사지는 긴급히 사적으로 가지정하였다가 문화재위원회를 통과해 정식 지정되었다. 흥덕사지 발굴 후 청주의 문화적 자긍심은 한껏 고조되었고 정부 지원으로 흥덕사지 정비와 고인쇄박물관 건립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흥덕사지가 청주의 새로운 문화자원으로 부각되면서 1995년 청주시에 처음으로 구가 생길 때 흥덕사지가 있는 무심천 서편을 흥덕구라 하게 되었다. 직지도 중요하지만 이를 탄생시킨 장소의 중요성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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