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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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5.03.25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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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요즘 난 이중인격의 삶을 살고 있다. 아니, 내 인격의 천박함이 샅샅이 까발려지고 있다.
 근래 맡겨진 사무적인 일을 하다 보니 사람에게 못된 짓을 한다. 일 시키기, 남 탓하기, 사람 괴롭히기, 소리 지르기는 기본이고, 일 저질러 놓고 손 빼기와 일 떠넘기기는 다반사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한탄해도 소용없다.
 바가바드기타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전사가 신에게 묻는다. “신이시여, 저는 사람을 죽여야 합니까?” 대답은 이렇다. “그것이 아무리 슬픈 일일지라도 너에게 주어진 일이라면 해야 한다.” 나는 이 구절을 보고 엉터리라고 생각했다. ‘안 하면 되지. 웬 잔소리냐. 의지의 부족이거나 쓸데없는 동정심일 뿐.’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자욱해져 오는 피비린내에 아찔할 수밖에.
 그래서 그랬는가. 부처는 ‘늘 하던 일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직업으로 하던 일(skillful job)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백정이 소를 잡는다고 해서 그것이 죄라면, 그는 영원히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불평등이 어디 있냐고 붓다는 말하는 것이다. 매일 소를 죽여도 해탈할 수 있다는 자비심의 무한한 확대를 그는 보여주었다. 그것이 바로 신분상 주어진 일로 벌어진 일은 업에 남겨지지 않는다는 무기업(無記業) 이론이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면서 중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직업으로서 사람을 죽이는 군인이었을지라도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과거는 묻지 않겠지만 미래까지 면죄부를 달랄 수는 없다. 불교의 위대함은 바가바드기타와 같은 힌두적 사고를 넘어서는 데 있었다. ‘여태 네가 먹고살기 위해 사람을 죽인 것은 묻지 않겠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안 된다.’
 나는 어떤가? 매일 죄를 짓고 있다.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있다. 남성에게는 자존심을 꺾게 하고, 여인에게는 눈물을 흘리게 하고 있다. 알면서도 저지르는 죄는 가장 큰 죄가 아니던가.
 사실 나도 그렇다. 학교라는 대전제가 없다면 참을 수 없는 굴욕을 견뎌내고 있다. 내가 바보가 되더라도 내가 속한 공동체가 잘 된다면 그것으로 좋다는 마음가짐이다. 그러나 마음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가 상하는 만큼 남도 상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더불어 상하자는 심보로 남을 괴롭힌다.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사람은 서로 괴롭혀야 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고도 즐겁게 일을 해낼 수 있는가? 즐거움은 방만함을 낳고, 괴로움은 피곤을 낳는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오늘날 정부의 정책이나 노사관계는 늘 한 방향인 것 같다. 모순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행복만을 말하지 삶의 어쩔 수 없는 불행을 말하지 않는다. 아픔을 숨기느라 기쁨이 헐겁다.
 떠나갔지만 나를 도와주던 졸업생은 물었다. “선생님, 그 선생님 맞아요?” 선생으로서는 속없이 웃고 다니던 나를 상사로 만나고 놀라면서 한 이야기다. 학생 앞에서야 언제나 너털도사지만 업무를 앞에 두고는 미운 사감 선생이 된 나를 보고 한 말이다. 배우는 사람이 뭐라고 해도 웃을 수밖에 없는 나는 일이 안되면 되게 해야 하는 나와 얼마나 달라야 하는가?
 나의 이중성에 정말 실망한다. 아니, 나는 본래 그런 나쁜 놈이었다. 땅을 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하늘이 분개할 일이다. 내가 생명의 여인을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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