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발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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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0.31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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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여행
이 정 애 <한국교원대 부설 월곡초교 교사>

가을이 오면 누구나 한번쯤 어디든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한다. 나또한 두 번째 가라 하면 서러울 정도로 여행을 좋아한다. 여행을 하고 싶을 때는 언제나 테마를 정하고 떠난다. 유적지, 사찰 또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교과서에 나와 있는 것을 꼭 보고 확인하고 싶어하는 나의 집착인지 모르겠다.

가끔 내 마음의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은 돈도 들지 않고 추억으로 빠져 들 수 있어 좋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억새밭이 끝없이 펼쳐진 첫 부임지가 새록새록 생각난다. 그곳은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의 고향 가기 전 증산이란 곳으로 태백선과 구절리로 가는 갈림길에 있는 곳이다.

초임 발령을 받아 맡은 학년이 1학년이었다. 2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에 남아있는 한 아이가 생각난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장난기가 덕지덕지 붙어있어 귀엽기 한량없지만, 나를 힘들게 했던 그야말로 철부지인 첫 번째 애제자.(愛弟子일명 내가 정하는 제자의 애칭이다)

한글 해득이 되지 않아 매일 늦게까지 텅빈 교실에 혼자 남아 받아쓰기 공부를 하거나, 내 곁에서 이것 저것 간식거리를 먹으며 그날 시험 봤던 것을 복습하고 다시 시험을 보곤 집에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탈 것에 관한 공부시간에 "비행기 타 본 사람" 했더니,

그 아이 혼자서 "저요." 했다. 내심 이 시골에서 비행기 탄 아이가 있다니 의심쩍어 하면서 '옳거니 이럴 때 기 한번 살려 주자'고 생각했다,

"그래, 언제 어디 갈 때 타 봤는데"

"작년에 가족들과 하와이에서 타 봤어요."

"하와이 갈 때 뭐 타고 갔는데"

"아빠 택시 타고요."

아뿔사, 반 아이들과 함께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그 아이 아빠는 택시 운전기사였던 것이고, 비행기를 탔던 곳은 바로 우리나라 관광지의 하나인 부곡 하와이였던 것이다.

80년대 중반만 해도 비행기 타고 여행을 떠난다고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인데, 비행기를 타 봤다는 그 애의 말을 잠시 잠깐 믿었던 내 마음도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웃음으로 남을 줄이야.

1년 반 후, 나는 그 학교를 떠났고, 몇 년 후 결혼을 하게 되어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가기위해 비행기 예약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군인이던 신랑이 결혼 며칠 전 신분증이 들어있던 가방을 도둑맞아 제주도 여행을 포기하고 부곡하와이로 가게 되었다. 그 곳에서 애제자가 탔다는 비행기를 타면서 '그 때 그 아이도 나처럼 행복했겠지'라고 생각하며 한없이 웃었다.

교직생활 하면서 1학년을 담임하게 되면 초임지의 그 아이가 생각나 어떤 아이든 '한글 해득만은 꼭 해서 보내야 되겠구나'하는 다짐을 하곤 한다.

어느 해 1학년을 맡았을 때 한글 해득이 되지 않은 아이가 있었다.

"도시락을 싸서 보내 주시면 좀 늦게 보내겠노라고 쪽지 편지를 써서 보냈다."

"우리 아이 공부 못 해도 좋으니 기죽이지 말고 빨리 보내 주세요. 공부 잘 해 봤자 선생 밖에 더 되요"

그 학부모는 교장실로 항의 전화를 한 것이다.

내 말은 설득력이 없었다. 결국 학부모의 희망대로 해 주고 가정에서 지도하도록 했다. 세상이 많이 변한 것이다. 마음이 씁쓸했다.

내가 잘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교단에 설 수 있다는 내면엔 추운 날 호빵 하나를 주었을 때 맛있게 먹어주던 그 아이의 순수함과 맑은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정선에 있는 증산의 민둥산 억새풀을 보러 추억여행을 떠나고 싶다. 가는 길에 그 때 그 애제자도 만날 수 있다면 더더욱 내겐 큰 추억의 여행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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