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가 꽃 필 때
수선화가 꽃 필 때
  • 이효순 <수필가>
  • 승인 2015.03.22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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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효순 <수필가>

주택 안은 아직 을씨년스럽다. 그러나 창밖엔 봄이 한창이다. 지난해 곱던 단풍잎이 채 떨어지지 못해 바싹 말랐다. 가지에 붙어 있는 마른 잎을 만지면 부스러질 것 같다. 그 틈새를 비집고 새순이 움튼다. 마른 잎새는 갈 곳이 없다. 새순이 자라면 자연스럽게 밀려 떨어질 테지만. 이맘때면 단풍나무와 세발자전거, 막내에 대한 일상이 아지랑이처럼 핀다.

주말 오후다. 여유 있는 마음으로 뜰을 바라본다. 따스한 봄볕도 마당 안에 가득하다. 겨우네 추위에 말랐던 잎새 사이에 연한 새순이 돋는다. 봄의 소리가 들리지 않으나 여기저기에 봄기운에 마음이 설렌다. 단풍나무 앞에 발을 멈춘다. 언제나 변함없이 지난해처럼 잎이 바싹 말라 서로 겹쳐 있다. 손을 대니 기다렸다는 듯이 떨어진다. 때 묻은 얼굴을 비눗물로 세수하듯 차례로 마른 잎을 따준다. 신기하다. 금세 단장한 신부처럼 가녀린 작은 가지들이 깨끗하다. 마른 잎을 제거하자 단풍나무 아래 있던 복수초에 따스한 봄빛이 내린다. 햇빛을 못 보아 봉오리만 봉긋하게 내밀고 입을 열지 못했었다. 이제 그늘이 없어져서 내주쯤에 필 것 같다.

여러 해 전 이른 봄 뜰을 청소했다. 단풍나무 가지에 붙은 마른 잎새가 눈에 거슬렸다. 손으로 마른 잎을 만지니 떨어지지 않는다. 가지까지 함께 딸려온다. 그 후 얼마 지났다. 겨울눈이 제법 커졌다. 막 새순이 트는 중이다. 그때 잎을 만졌다. 잎이 힘없이 떨어진다. 새순에 밀려갈 곳을 잃은 모양이다. 내 손으로 만질 때마다 잎이 모두 떨어졌다. 그 후부터 난 기다렸다. 뜰의 수선화 꽃이 노랗게 필 때 마른 잎은 내 손놀림에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우리 쌍둥이가 걸음마를 막 시작할 때다. 남편은 서울 출장 다녀오는 길에 빨간 세발 자전거 한대를 사 왔다. 쌍둥이 선물로 사온 것이다. 큰아이를 그곳에 앉히자 발이 발판 위에 잘 닿지 않았다. 자전거 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냥 두 발로 보행기를 타듯 밀고 있었다. 남편은 기대하던 것과 어긋나니 눈빛이 달라졌다. “왜 못 타느냐?”라며 목소리까지 높였다. 아직 다리가 짧아 제대로 타지 못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은 듯. 아이는 아무 말 없이 긴장된 얼굴에 눈물이 맴돈다. 그 모습을 보며 속이 상했다. 어린 것이 얼마나 맘이 편치 않았을까. 이듬해 아이는 빨간 자전거를 제법 신나게 타고 놀았다. 자전거 탈 때가 된 것이다. 그동안 다리가 더 자라서.

막내는 긴 시간을 거쳐 노력해 지금의 일터를 갖게 됐다. 그 과정은 자신도 매우 힘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 또한 힘겨웠다. 한 과정이 끝날 때마다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4년 반의 긴 시간이 흐른 후 자신의 목표를 이루게 됐다. 즉 때가 된 것이다. 

자연, 사람, 모든 사물엔 때가 있는 법이다. 자연과 사람의 때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자연은 사계절의 변화와 더불어 때가 오게 된다. 사람은 어느 성장 과정까진 때가 있지만 성장 후에는 자신의 노력이 따르지 않으면 목표를 이루기 어렵다. 끈질긴 노력이 있어야 좋은 열매를 때를 맞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기다림 없이 결과만을 보기 원한다. 사람들의 욕심으로 인해 때로는 서로 마음이 불편해진다. 또한 불쾌한 말도 오간다. 그렇지만 슬기롭게 노력하고 기다리는 이에게 때는 오는 것이다. 수선화가 꽃 필 때지는 마른 단풍잎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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